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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궁극적 관심

고흥식 목사
영통영락교회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이성적 숙고들에 의해서도, 자연적인 필연성들에 의해서도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자연 밖에서 인간에게 선사되는, 인간을 압도하는,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계시로써, 은혜로써 표시되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인간이 다른 문화영역들에서와 같이 독자적 창조적이 아니며 철저히 순종적 예속으로 이뤄진 것이다. 결국 신앙은 궁극적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의 동태(動態)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동태이다.


사람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다. 특별히 음식물이나 거주처소 같이 그의 생존 자체를 조건 짓는 것에 대하여 그렇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른 생물적 존재와는 달리 정신적 관심사, 즉 인식적, 심미적, 사회적, 정치적 관심사가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시급하다. 아주 시급한 관심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관심사와 마찬가지로 인간 생활 또는 한 사회 집단의 생활을 위해서 궁극적 관심사를 주장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궁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그것은, 비록 모든 다른 주장들이 그것에 굴복해야 하거나 그 이름으로 거절돼야 할지라도, 그것의 전체적인 성취를 기한다. 어떠한 국가 집단이 그 국가의 생명과 성장을 그의 궁극적 관심사로 삼는다면, 그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관심사들, 즉 경제적 행복, 건강과 생명, 가족, 심미적 또는 인식적 진리, 정의와 인간성을 희생시킬 것을 철저히 요구한다.


금세기의 극단주의는 개인의 일생 생활의 사소한 관심거리까지를 포함해서 인간 실존의 모든 면에서 궁극적 관심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찰하는데 좋은 실험실 구실을 한다.
그 국가 집단의 모든 것은 ‘국가’라고 하는 단하나의 ‘신’에 집중된다. 그 신은 틀림없는 악마이지만, 궁극적 관심의 무제약적(無制約的)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가끔 지구상에 나타나 횡포의 폭력적 폭군으로 나타난다. 그 한 예로 북한의 ‘주체사상’, ‘인간우상’의 실례(實例)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 관심거리가 되는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무제약적인 요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신앙의 행위에서 받아들여지는 궁극적 성취의 약속이기도 하다. 이 약속의 내용이 반드시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명료한 상징으로써 표현될 수 있지만, 또한 사람이 비록 그것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참여하는 그 사람의 국가의 위대성이라든가 ‘구속적(救贖的)인 민족’에 의한 인류의 정복과 같이 문자적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구체적인 상징으로써도 표현될 수 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약속되어지는 것은 ‘궁극적 성취’요, 무제약적 요구가 무시될 때 위협받는 것은 이러한 성취로부터의 제외인 것이다. 반면,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도 요구와 약속에서 궁극적 관심을 가졌다. 이 관심의 내용은 국가가 아니고 정의의 하나님이다.
모든 개인과 모든 국가에 대해서 정의를 대표하기 때문에 정의의 하나님이며, 또 보편적인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큰 계명이 주어졌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9:5). 이것이 궁극적 관심의 참의미이며, 이 말에서 ‘궁극적 관심’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위의 말들은 분명히 순수한 신앙의 성격과 궁극적 관심의 주제에 대한 전체적인 복종의 요구를 표시하고 있다. 구약 성경은 이러한 복종의 본질을 구체화 시키는 명령들로 차 있고, 또 그것과 관계되어 있는 약속들과 위협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또한 상징적이고 불분명한 약속도 있다. 비록 그것들이 국가 생활과 개인 생활의 성취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위협이 국가적 멸망과 개인적 파멸을 통해서 성취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구약성경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요구와 위협과 약속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그리고 무제약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 하나의 ‘예’(반예<反例, counter example>라고 할 수 있지만 똑같이 계시적인)는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 대한 궁극적 관심이다. 그것은 대단히 경쟁적인 서방 문화에 젖은 많은 사람들의 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궁극적인 관심이 이르게 될 필연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록 순수한 인간관계, 인격적 확신, 그리고 창조적 에로스(eros)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그 자체의 법칙에 무제약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 위협은 사회적 및 경제적 패배요, 그 약속은(모든 그러한 약속들이 그렇듯이 불확실한)자기 존재의 성취이다. 이런 신앙의 파탄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대다수의 현대 문학의 특징을 이루고 또 그런 문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산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 각종의 부문에서 나타난다. 한 번 성취되면, 이러한 신앙의 약속은 공허한 것이 된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관심되어져 있는 상태이다. 그 내용은 성도의 생활과 뗄 수 없이 깊이 관계되는 것이지만, 신앙의 형식적인 정의(定擬)에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동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첫 단계이다.
진실로, 신앙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이며, 그분을 실재적,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역사 하시는 분으로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 하셨기에 우리도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인격적 관계 교환이다.


‘사랑’이야 말로 믿도록 만드는 동력(動力)이다. 이성이 아니라 마음에 느껴지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다. 곧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이 사랑에 뿌리박고 있는 신앙은 이론도 아니요, 연역(演繹)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뜻밖에, 갑작스럽게 한 인간의 존재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인간의 존재를 통째로 사로잡는 것이다. ‘사람은 이성(異性)에 반하듯이 주님께 반하는 신앙인이 된다. 신앙은 삶의 힘이다!
능력 있는 신앙은 그분의 약속만을 믿고 의지한다.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 웃고, 그것도 분명히 가능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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