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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날

2019년 부활절이 우리 앞에 찾아왔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이 직접 부활체로 나타나심으로 그 약속을 확증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안겨 주신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까지의 기록을 보면 우리는 주의 길을 따르는 자들의 흥미로운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가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고 부활을 목도한 후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며 나아갔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겼다가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 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주님을 모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도한 후 의심하지 않고 바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가(막 16:11) 직접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고 난 후에야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중심에 두고 여러 가지 반응들이 나타났지만 주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깨닫게 된 순간 그들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달려나간다. 그것은 바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란 지상명령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에게 이제 과거 두려움에 떨었던 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히고 돌팔매질을 당한다하더라도 그들의 입은 쉬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으며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는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이대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해도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저 매년 찾아오는 행사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말이다.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해 제자로 삼고 그들을 삶의 현장이나 불신자 가족, 더 나아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힘을 쏟는 것이 아닌 외양적인 부분에만 치중하고, 온갖 파당을 통해 서로에게 사랑의 말보다 살갗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는 독설만이 가득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일은 결국 교회의 존재 이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중대한 실착으로 이어지게 된다.


부활의 날을 맞아 우리가 다시금 되새길 것은 오직 말씀뿐이다. 인간적인 생각과 욕심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서로와의 다툼이 아닌 사랑과 화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란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직 예수님 하나만 바라보며 나아갔던 초대교회의 모습, 서로를 원수 삼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대하는 그 모습을 회복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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