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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명국 목사 회상록 - 자기 희생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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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사랑은 현대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 양대주류로 해석된다. 그 하나는 사랑의 본래 어의가 자기희생으로 보는데 이것을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입장으로 보면 그는 인간의 모든 양상이 상호 간의 이해타산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사실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상호관계가 희생적인 사랑과 모든 양상의 상호 사랑 사이에 존재한다는 논증에 있어서 니부어는 상호간의 사랑 개념이란 상호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라고 비평했다.

 

다니엘 윌리암스(Daniel Williams)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소망’(God’s Grace and Man’s Hope)에서 현재 인간의 상태가 악독과 곤궁이 그리스도의 영역 내의 선과 혼합해 진치고 있다. 사실적으로 모든 사랑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과 혼합하는 것이다. 욕망은 가능한 무의식을 포함하는데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한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을 위한 자기의 욕망으로 나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에 의하여 찾아진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는 우리가 진정한 상호애의 생활을 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의심없이 집중된 자신이거나 자신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윌리암스는 상호 애란 자기희생적인 것으로 현재상태에 있어서 자기희생은 자기애의 우주적 소유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소유에 불과하지 만물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의 표준으로 주셨고 신약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라고 예수님께서는 친희 사랑의 계명을 말씀해 주셨다.

 

이러한 상호애나 어떤 다른 종류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자세임에 주의할 것이다. 니부어의 정의를 빌리면 상호 애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의 최고 가능성이며 그러한 사랑은 역사적 칭의로서 공평무사한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상호관계의 사랑 추단은 차라리 단절된 행위의 결과보다도 무계획적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추단이란 너무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것까지 망치기 때문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유일한 희생이라고 주장 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신적 생명이나 신적 존재가 세계로 흘러나오는 것의 속성일 것이며 따라서 사랑은 곧 신적인 원천이 우리 생명 안에 최고도로 유입되는 현상을 상직적으로 표현한 명상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특별히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프리드리히 슐라이엘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는 말했다.

 

이것은 죄악과 슬픔의 세계에 살며 신약의 메시지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흠망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귀한 대답이다. 사랑의 계시는 우리에게 바른 사랑의 뜻을 보여준다.

 

니부어 교수는 계시가 우리의 자기 이해와 도덕법의 지식을 더욱 강조하거나 밝히거나 완전케 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로운 정신적 자기인식 속에 상호애의 감각을 가졌다. 게다가 인간의 이성은 그것 자신이 사랑의 법 근원은 아니지만 복잡한 인간 관계에 있어서 사랑의 정의를 규정하는데 도우는 일을 한다. 신앙은 이성이 예측한 바를 언제나 강조한다. 이성적 자기인식은 인생의 법으로 윤곽을 그리고 사랑이나 신앙으로써 설명된 이성 때문에 세속의 심리학은 필요없게 될 수 있다고 니부어는 설명했다.

 

자기의 희생적 사랑이나 자신을 남을 위해 바치는 것은 동질적인 사랑으로 보인다. 의심 없이 니부어는 사랑을 인생의 법인 양 합리적 이해로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아가페는 상호애의 양상과 이성적 윤리 속으로 희미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어떠한 지불을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먼저 받아야만 한다. 사랑은 근본적인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나 다만 믿음으로 상대자인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절망에서의 계약이라 보았다. 하나님과 범죄자와의 사이에는 인간의 지극한 사랑이나 선행이 무한한 심연 (abyss) 위에 다리를 놓을 수 없다. 하나님 편에 서의 계시와 인간편에서의 믿음으로 서로 만나는 점에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슐라엘마허는 믿음이란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신적 요구에 만족을 느끼는 첫 번째 경험이다라고 했다. 믿음은 확실히 체험으로 믿음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실제적 경험을 가진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는 은혜라고 사랑과 법의 최종결론을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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