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은 축복의 통로였다. 은혜로 평화의 사도인 이삭(Isaac)을 얻었다. 이삭도 축복의 통로였다. 그 역시 은혜로 축복의 조상 야곱(Jacob)을 얻었다. 야곱도 대를 이은 축복의 통로였다. 그 또한 은혜로 예수의 형상인 요셉 (Joseph)을 얻었다. 축복의 물줄기가 대를 이어 흐르는 은혜로 인해 그 가문이 축복의 통로가 됐던 것이다.
어느 학자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막스 죽스(Max Jukes)라는 18세기의 두 가문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막스 죽스는 머리는 좋았지만 불신자였고 부도덕한 사람, 비슷한 처지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집안에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이 끊이지 않았던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수 잘 믿는 은혜의 사람, 미국 초창기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 자였으며, 그 부인 역시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그 두 가정에서 나온 후손들을 보면 너무 달랐다. 막스 죽스의 506명 자손 중 310명이 거지였고, 150명은 범죄자, 그중 70명은 살인자였다. 사형당한 사람이 109명, 후손의 1/3이 정신병자, 절반 이상이 문맹자로 마약사범, 알코올 중독 등으로 범죄자의 길을 걸었다. 그 가계에서 정부에 끼친 손해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25만 달러였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 가문의 1394명 자손은 교수 65명, 상원의원 3명, 주지사 2명, 부통령 1명, 판사 30명, 변호사 102명, 외과의사 56명, 군대장교 75명, 선교사 100명을 배출했다.
그 가계에서 정부에 해를 끼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장에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정이 등장한다. 은혜를 잃고 몰락하는 엘리(Eli) 제사장 가정과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는 한나(Hannah) 가정이다. 기도해서 은혜로 얻은 사무엘(Samuel) 은 태양처럼 등장한다.
엘리 가정의 타락상
왕(王)도 사사(Judge)도 없던 시절, 엘리와 두아들 홉니(Hophni)와 비느하스(Phinehas) 3부자(父子)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이었 다. 이 정도면 큰 은혜를 입었던 가정인데 성경은 이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세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12), 제사장들인데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여호와를 무시했다는 뜻이 거나 알더라도 머리로만 알 뿐 가슴으로는 무신론자였다는 말씀일 것이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가장 기름진 고기와 제물을 자기들이 먼저 먹었다고 한다(2:14~17). 흠이 없고, 좋은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를 먹어야 하는데 좋은 것을 자기들이 먼저 먹었다는 것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다는 뜻, 심지어 권력으로 윽박질러 강제로 빼앗아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2:16). 제사보다 잿밥에만 욕심을 낸 꼴로 너무 추하다.
그리고 셋째는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고 한다(2:22). 공개적인 장소에서 성적 범죄를 저지른 것, 그들은 은혜를 저버린 지도자들이었다. 아버지 엘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겼고(2:29), 말씀도 없었다고 한다(3:1). 말씀보다 사사로운 정(情)이 더 앞섰다는 것도 문제지만 제사장에게 아예 말씀이 없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뿐이 아니다. 성경은 아들들이 망나니가 될 정도로 엉망이었다고 한다(25절).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인삼은 ‘6년근’일 때 캐는 것이 가장 좋다는데 산삼은 언제 캐는 것이 가장 좋을까? 보는 즉시 캐는 것이 가장 좋단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도 마찬가지, 보는 즉시 고쳐야 한다. 그런데 엘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물론 자녀들의 불순종도 문제였다. 잠언서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 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30:17)고 했는데 엘리 자녀들이 그랬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교회 중진들의 자녀들 중 예수 믿지 않는 자녀들이 많다. 또 교회 안에 무신론자들이 득세하여 세상적인 방법과 별로 다르지 않게 교회를 운영한 다. 직분을 받기 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직분을 받은 후에는 직분만 있고, 헌신이 없다. 그러면서도 직분 때문에 그들이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또 대형교회의 문어발식 성장추구는 대기업의 행태와 다를 바 없고, 종종 보도되는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상은 엘리의 아들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 은혜 아니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의 집에 내린 저주
성경은 엘리 제사장 자녀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크다고 했다(2:17).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의 타락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고 경고하신다(2:25). 그리고 유명한 코멘트,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2:30)고 하셨다.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든 이웃이나 자신을 향한 것이든 죄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결국 엘리 가문에 당신의 저주를 선고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셨다 (2:27~36). 아마 무명의 선지자였던 것 같다. 그의 선고를 보면 하나님께서 대노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30절) 전에 맺었던 언약이 파기(破棄)됐다는 선고다. 배은망덕(背恩忘德)했기 때문이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구원도 은혜를 알고 믿음 안에 머물 때만 유효한 것이다. 이 사람의 예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네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2:34), 그들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였겠지만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법, 결국 두 아들 제사장은 이 예언대로 블레셋(Philistine)과 싸 우다 한 날에 죽는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4:11).
엘리의 마지막이 너무 비참하다. 98세에 법궤를 빼앗긴 것과 아들들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듣고 비둔한 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놀래서 뒤로 넘어지며 충격으로 목이 부러져 죽는다.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도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줄초상의 비보를 듣고 충격을 받아 조산한다. 얼마나 아팠으면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Ichabod) 이라 지었다.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 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잃어 심판당한 엘리 가문은 노인이 없는 단명한 가문이 되었고, 제사장이 아니라 시종보다 못한, 요즘 말로 ‘폭망한 가문’이 되고 말았다. 은혜를 저버린 것이 저주를 동반한 무서운 심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무엘, 하나님의 준비
이 와중에도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었다. 그 대책이 바로 사무엘(Samuel), 그 역시 은혜였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18절). 사무엘이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씀은 11절에 이어 두 번째, 강조한 셈이다. 과연 한나의 눈물 젖은 기도로 탄생한 아이답다. 21절에서도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6절에서도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하나님은 사무엘을 어린 시절부터 구별된 아이로 은혜 가운데 자라게 하셨다.
제사장 가문의 몰락이라는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의 하나님의 준비가 너무 은혜롭다.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성장 과정부터 전혀 다른 충실한 제사장을 준비하신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35절).
하나님의 준비는 사무엘뿐만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David)으로 이어졌고, 또 엘리(Eli) 가문을 대신할 사독(Zadok) 계열의 제사장으로 이어졌다. 어둠을 뚫고 비치는 찬란한 빛과 같은 큰 은혜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 코로나19로 많이 힘들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이끄실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유대교 대신 기독교를, 중세의 교회 대신 성프란체스코(San Francesco, 1182~1226)의 수도원을, 그리고 타락한 가톨릭교회 대신 변방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종교개혁자 (Reformers)들을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낡은 부대가 되어버린 한국교회가 아니라 은혜로 재무장한 한국교회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 은혜 아니면 / 나 서지 못하네/ 완전한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 주의 은혜로/ 나 살아가리라/ 십자가 사랑/ 그 능력으로 나 살리라/ 주 은혜로 나 살리라”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