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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 대결(삼하17:1~29)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40
다윗 가정의 비극(4)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헤브론에서 자기가 왕이라고 선포한 압살롬이 쿠데타 세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16:15). 성경은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르렀다’고 그의 이름을 특별히 거명했다. 아히도벨이 헤브론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고, 다윗이 가장 경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압살롬이 취할 행동을 제시하는 사람, 그의 지략이 얼마나 뛰어난지 성경이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16:23).


그런데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다윗의 친구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가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치는 예상외의 일이 벌어진다. 위장 전향이다. 충성을 맹세하는 척한 것이다. 의외였기에 압살롬은 아버지 친구면서 왜 아버지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의심했다는 말이다. 후새는 “나는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겠다”(17:18)고 한다. 사사로운 감정보다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다는 뜻이다. 위장 전향을 숨기려고 은근히 ‘당신은 하나님이 택한 자’라는 식으로 아부성 발언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겼듯이 그의 아들 왕을 섬기겠다”(17:19)고 한다. 마치 압살롬의 즉위가 합법적인 것처럼 말하며 후새는 압살롬 진영에 침투한 것이다. 


대결 핵심: “어떻게 다윗을 죽일까?”
압살롬은 지금까지 자기 곁에서 승리를 이끌던 아히도벨에게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 아히도벨은 먼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한다. 그래서 압살롬은 옥상 야외에 천막을 치고 백성들 앞에서 후궁들과 동침한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옥상에서 내려다보던 상황을 연상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음 책략을 제안하는데 허락하신다면 자기가 병사 1만2천 명을 끌고서 다윗을 기습하겠다고 한다. 즉각 공격하자는 제안이다. 소규모 군사로 지금 기습하면 다윗은 지쳐서 전의 상실 상태로 달아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한다는 좋은 계략, 아히도벨은 다윗 왕만 죽이면 전쟁은 끝난다고 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 모두가 이 계략이 옳다고 한다. 이게 4절까지의 내용이다.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은 후새의 말도 들어보자고 한다. 아히도벨은 물론 주변 사람들은 아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때 후새가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않다”고 한다(7). 후세도 참 똑똑하다. ‘이번에는’, 이 말이 참 지혜로운 말 같다. 그러면서 ‘새끼 뺏긴 곰’같다는 비유까지 들며 설명을 참 잘한다(8~9). 


아히도벨이 이성에 호소했다면 후새는 감성에 호소하는 화려한 언변으로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갑자기 자기들이 이미 승리한 것 같은 착각에 부풀었다. 후새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거짓은 원래 말이 많은 법, 아히도벨에 비해 설명이 길다. 환상에 취하게 한다. 하지만 이성에 호소하는 것은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이길 수 없는 것, 지략 대결에서 후새가 이긴다(14).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이런 걸 우리는 전문용어로 ‘미혹됐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4).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이 채택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것, 후새의 세치 혀에 미혹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략이라는 말이다. 


한편 이기는 법을 알았던 책사 아히도벨은 너무 똑똑한 게 문제였다. 지략 대결에서 밀리고 난 다음 이런 어리석은 왕과 백성들이라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낙향해서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한다. 이걸 본다면 그 또한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사실은 다윗을 배신할 때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그 선택이 결국 그를 죽게 했다. 


스파이 작전: 성공일까 실패일까?
아히도벨의 모략을 저지한 후새는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한다. 위험하니 오늘밤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말고 빨리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첩보인데 여종이 성 밖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이 내용을 전달했지만 다윗에게 가던 두 사람이 발각되고 추격당한다. 그들이 바후림이란 곳에 있는 어느 집에 숨어들자 그 집 여인이 그들을 우물로 내려가게 하고 아귀를 덮고 그 위에 찧은 곡식을 널어놓는다. 한 청년의 고발로 추적자들이 쫓아오지만 여인이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추적자들은 더 이상의 추격을 멈추고 돌아간다. 마치 스릴 넘치는 스파이 영화 장면 같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여호수아서의 기생 라합과 같은 여인이다. 그런데 라합도 두 정탐꾼을 숨기고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정탐꾼들을 탈출시켰는데(수2:5) 문제는 성경이 거짓말을 한 이 여인이나 라합을 잘못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라합은 예수님의 계보에까지 등장하는 영웅처럼 기록했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을 말해야 할 때, 가령 생명을 살리기 위해, 또는 선한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는 인생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 같다.


후새도 마찬가지다. 압살롬을 속였다. 다윗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을 만나자마자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16:17)를 외쳤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이 교묘하다. 왕이라고는 했지만 압살롬인지 다윗 왕인지 아리송하다. 그는 단 한 번도 직접 압살롬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들’, ‘왕’이라고만 했을 뿐인데 아들이라면 솔로몬도 될 수 있지 않나? 빼어난 처세술, 그는 뱀같이 지혜로웠다.


돕는 사람들: 이익 때문인가 의리 때문인가?
압살롬은 길르앗에 진을 치고, 다윗은 마하나임 쪽에 진을 친다(24~26). 마하나임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곳, 옛날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보호를 받은 곳이다. 숫자는 압살롬 쪽이 많았지만 그들은 사실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이익이 없으면 순식간에 흩어질 사람들이다. 반면에 다윗 편은 압살롬 편보다 숫자는 적지만 의리의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암몬 족속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도 있다(27). 암몬 족속은 사울 때나 다윗 대에 이스라엘 동쪽을 괴롭혔던 세력이다. 그런데 다윗 편에 서서 싸운다. 완전히 복속되고 마음까지 준다. 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도 다윗을 돕는다. 그는 큰 부자다(19:32). 소비와 바르실래 외에 암미엘의 아들 마길도 다윗을 돕는다. 그렇다면 각 지역의 부유한 자들, 존경받는 자들이 다윗을 도운 것이다. 


놀라운 것은 피난갔던 다윗이지만 다윗은 가는 곳마다 먹을 것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는 다윗의 고백 그대로다. 승리를 예상한 것인가? 늑대와 이리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양떼들에게 선한 목자가 싱싱하고 맛있는 꼴로 대접하듯 하나님이 부자들을 통해 원수의 목전에 상을 차려 주셨다. 원수들의 목전이지만 목자로 인해 양들이 편안하고 행복하듯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영광의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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