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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의 복음주의 신앙과 항일활동과의 관계

말콤 펜윅 다시보기 - 3
김용국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교회사)

1905년 11월 19일 교단 연합 구국기도회
대한기독교회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구국기도회를 공동 개최하고, 전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루 한 시간 나라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1905년 11월 1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와 기도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長老會와 浸禮會와 美美會에셔 公同 聯合會를 團結야 祈天永命의 主旨로 獨一 無二 시고 全智全能신 造物主大主宰上帝耶和華케 爲國祈禱를 虔恭至誠으로 日日 設行다 其日日誦 禱 全文이 如左더라.… 祈禱時間은 每日申時(午後三時와 四時)오 祈禱文이 如左니 萬王의 王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韓國이 罪惡으로 沈淪에 드럿스 오직 하나님 밧게 빌 업사와 우리가 一時에 祈禱오니 韓國을 불샹히 녁이시 耶利 未亞와 以賽亞와 但以理의 自己나라 爲야 懇求을드르심 갓치 韓國올 救援사 全國人民으로 自己罪를 悔改고다 天國百姓이 되어 나라이하나임의 永遠 保護밧아 地球上에 獨立國이 確實케야쥬심을 耶穌의 일홈으로 비나니다.…”

 

위 기도문의 내용은 국가가 멸망에 처한 때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듯이, 한국 기독교인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는 것이다. 기도문은 기독교 민족운동의 근거를 성경의 예언자들에게서 찾았으며, 운동의 실행 방식은 회개하고 기도하는 영적 방식을 제안했다. 이처럼 무장 투쟁을 반대하고 비폭력적 저항과 성경적 가르침에 부합한 민족운동을 펼치는 것은 당시 복음주의 신앙인들이 추구한 방식이었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는 구국기도회가 복음주의 신앙에 부합한다고 보아서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구국기도회의 참여는 간접적 항일활동으로 볼 수 있다. 


펜윅의 1906년 애국가 보급
펜윅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에 애국가를 작사해 교인들로 하여금 부르도록 했다. 애국가는 5장으로 되어 있으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 노ᄅᆡ
1. 우리 대한 나라 대한국을 위해 노ᄅᆡ합세 
   열셩조 나신데 ᄯᅩ 도라가섯네
   모든 산것 혜셔 노ᄅᆡ합세
2. 우리 대한 일흠 엇지 ᄉᆞ랑ᄒᆞᆯ가 우리 대한 
   그 산과 골이나 그 강과 수풀 다
   ᄉᆞ랑ᄒᆞᄂᆞᆫ 우리 노ᄅᆡ합세
3. 걱정ᄒᆞ지 말고 하ᄂᆞ님만 의자 성자 밋세
   구쥬 밋ᄂᆞᆫ 백셩 성경을 조츠면
   아모 나라던지 핍박업네
4. 맘 먹고 니러나 하ᄂᆞ님 압헤셔 긔도합세
   잘못된 일 ᄌᆞ복 죄사ᄒᆞᆷ을 밧어
   긔독ᄭᅴ 의지로 나라 세오
5. 기ᄌᆞ 세운 나라 엇지 니즐소나 만셰 만셰
   대한의 사ᄅᆞᆷ 다 행실 뉘쳐 고쳐
   힘써서 나를 다시 셰오.

 

위의 애국가는 1905년 11월 구국기도회와 유사하게,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성경적 삶, 회개, 기도,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국심과 복음주의 신앙을 국가 회복의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구한말 시대부터 애국가 제창을 나라 사랑의 상징물로 사용했다. 1896년 달성교회의 애국가, 그리고 평양 예수교학당 김종섭의 애국가 등을 위시하여 여러 애국가들이 지어지고 불려졌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도 한국교회의 애국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동참했다. 1906년의 상황에서 애국가의 작사와 보급은 항일활동으로 볼 수 있다.


1916년 “포교계” 제출 거부와 수난
일본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전문 19조의 “포교규칙”을 발표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동년 10월 1일부터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포교규칙”은 교파의 명칭, 포교자 명단, 교회당의 위치, 신도 숫자 등 보고사항을 자세히 적시했고, 새로운 교회당 설립 시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처럼 “포교규칙”은 총독부가 교회의 제반 사항을 파악하여 통제와 감시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목적에서 발표된 것이다. 그 무렵 펜윅은 선교후원금 문제로 1915년 잠시 미국과 캐나다에 다녀왔고, 1917년 5월에 다시 출국해 5년이 지난 1923년 5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환경에서 “포교계” 제출 문제는 한국 교인들이 주도적으로 결정했다. 1916년 11월 18일 경북 예천구역 신원교회에 열린 11차 대화회는 “포교계” 제출 문제가 중심적인 논의 안건이었다. 교단의 지도급 목사였던 손필환과 김규면은 “포교계”를 제출하지 않으면 교회의 폐교로 이어질 것이므로, 다른 교단들처럼 “포교계”를 제출하자고 주장했으나, 감목(총회장)이었던 이종덕 목사는 “포교계” 제출은 정교분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대화회는 결국 “포교계”를 제출하지 않는 쪽으로 결의했다. 이에 반발한 손필환은 교단을 탈퇴해 일부 교회들과 함께 1916년 12월에 대동교회(大同敎會)를 조직했고, 김규면도 교단을 탈퇴해 함경도, 간도, 시베리아 일대의 교인들과 더불어 대한성리회(大韓聖理會)를 설립했다. 이종덕 감목은 “포교계” 제출 거부로 일경에 의해 체포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공주교회(現 꿈의교회)를 비롯한 일부 교회들은 교회당이 폐쇄되고 집회를 금지당했다.


일제는 3·1독립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0년부터 문화정책을 채택했다. 그 일환으로 “포교규칙”을 완화하고, 종교단체에 법인 자격을 부여하며,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확대하는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총독부는 종교 행정과 사무를 위해 학무국에 종교과를 따로 신설해 영어에 능통한 기독교 신자를 직원으로 뽑아 외국인 선교사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외국인 선교사 연합대회에 학무국장이 찾아가 선교사들의 고충사항을 청취했다. 이러한 노력은 효과를 발휘해, 선교사들이 일본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대한기독교회는 일본의 정책이 확연히 변경된 1922년에 이르러 “포교계”를 제출해, 폐쇄된 교회들이 다시 예배드릴 수 있게 했다. 대한기독교회의 “포교계” 거부와 수용의 과정은 교단이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복음주의 신앙 원리에 따라 일제의 통치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일제의 요구가 복음적 신앙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경우에는 박해를 불사하고 항거했으나, 일제의 명령이 복음주의 신앙 원리를 지키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독립운동가였던 김규면이 “포교계” 제출을 주장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김규면은 1881년 3월 12일 함경북도 경흥군 상면 농경동 오송골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졸업한 후, 육군무관학교 속성과를 다니다가 1904년 9월 중도에 그만뒀다. 학교를 그만 둔 얼마 후에 원산에서 펜윅을 만나 개종했고, 훈춘과 연해주 지역에 권서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는 1914년에 이동휘 등과 함께 황청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김규면과 관련해 기존의 한국침례교 역사와 정반대의 주장이 있다. 한국교회사가 오세호는 김규면은 “포교계” 제출을 반대했으나, 이종덕이 “포교계”를 제출키로 결정했고, 이에 반발하여 탈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규면이 일제와 타협한 외국인 선교사가 주도하는 교단에 한계를 느끼고, 대한성리교회를 세워 독립운동을 이어가려 했다고 주장했다. 오세호는 대한성리교회의 신앙과 교규, 교단 운영 방식은 대한기독교회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했고,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300여 교회와 3만 명의 교인이 있었으며, 김규면은 훈춘의 대한성리교회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군단체 대한신민단을 조직했다고 했다. 오세호는 김규면이 “포교계” 반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교단을 탈퇴하였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오세호가 왜 기존 역사에 반대되는 주장을 펼쳤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김규면의 독립운동가 면모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그랬을 것으로 판단된다.


김규면이 대한성리교회를 대한신민단의 기반으로 사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대한기독교회를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일단 유지돼야 했고, 그런 목적으로 “포교계” 제출을 주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이종덕과 대한기독교인들은 복음주의에 기초한 정교분리 사상에 의거 “포교계” 제출을 거부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복음주의 신앙 양심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일제에 항거했던 것이다. 한편 이종덕은 19세 때 의병대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으로부터 수배를 당한 경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도피 도중에 전도 받아 대한기독교회에 입교했고, 펜윅의 도움으로 수배가 중지되자 의병활동을 접고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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