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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기능적 통제(2)

박종화 목사의 가정사역-25
박종화 목사
빛과사랑교회

우리는 가족체계 내에서도 개개인의 자아경계선이 침범받지 않으면서 가족 전체가 융통성 있고 원활하게 움직여 모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순기능의 체계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순도가 높은 순기능의 체계란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누려지고 가족 전체적으로도 모두의 자유에 만족하는 체계다.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다. 법은 모든 사람이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개개인이 최대한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규칙이나 법, 국가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인격에 반하는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법이 될 때 매우 위험해진다.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자유가 금지당한 복종은 나치즘과도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일의 역기능적 가족체계는 사회와 국가적인 역기능을 초래해 전체주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제도하에 히틀러라는 독재자를 탄생시켰다.


물론 이러한 역기능적인 사회와 국가체제는 다시 역기능적인 가족구조를 만들어 내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역기능의 항상성은 유지되거나 강화가 된다. 이러한 역기능적인 가족구조와 독재자가 절대 권력을 가진 역기능적인 국가체계가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 수 있었다. 역기능적 통제는 개인의 내적 자유가 금지되고 자기 스스로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기능들은 마비된다. 또한 개인의 감정은 금지를 당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복종은 교주를 만들어 내고 그 교주나 잘못된 교리에 의해 집단 자살을 일으키기도 한다. 전쟁 중에는 힘없는 노인이나 어린이, 여성들이 학살당하기도 한다.


부모는 힘이 있고 자녀는 힘이 없다. 힘 있는 부모가 힘이 없는 자녀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순기능적인 작용을 하고 개개인이 독립된 인격을 갖추고 서로 존중하며 모든 가족과 사회가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다. 반면에 힘이 있는 부모가 힘이 없는 자녀를,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국가가 힘이 없는 사람이나 국민을 과도하게 통제하고 자유를 규제하게 된다면 이것은 역기능적이고 폭력적이다. 순기능적인 국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다. 순기능적인 가족은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을 이을 자녀가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자녀의 필요를 채우고 사랑한다. 그러면 그 자녀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실행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자율성이 없는 봉사, 기쁨이 없는 이타적인 사랑 등은 거의 모든 권위적인 사람에 의해서 지배 받고 통제 당했던 경험에 의해 상처를 받고 거짓 자기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 사람은 힘 있는 지배자에 의하여 굴종을 당한 상태로 무의식적인 자신의 생존전략에 의하여 착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거나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되곤 한다. 이러한 역기능의 에너지는 강박적인 복종과 개인의 자유를 무너뜨리는 통제로 나타난다.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상처 입은 아이는 자신의 현재 참 감정과 느낌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성적인 감정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부인하거나 아예 성 중독으로 빠질 수도 있다. 어린 아이었을 때 가져야 할 자연스런 감정과 욕구가 상처 입은 아버지에 의해 감시당하고 통제 당하며 금지됐던 것처럼,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서 자기 자녀의 욕구와 감정, 그리고 생각을 감시하고 통제하게 된다. 사람이 감정, 신체, 욕구, 생각을 통제당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존감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자아경계선이 침범당하는 가운데 가족이나 사회자체가 질서 정연하고 권위와 통제에 의해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이 역기능적이다.


가족은 인격이 형성되는 장소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아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되며 한 몸 됨의 관계를 이루도록 인격을 내면화하는 장소다. 이러한 기회를 놓친 상처 입은 성인 아이는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할 뿐 자신의 신체와 감정, 욕구와 통제에서 여전히 참 자기를 찾지 못한다.


나는 오랜 시간 치유의 과정을 겪었다. 내 자신이 어느 정도 치료가 된 지금은 내담자와의 상담에 있어서 상처 입은 성인 아이를 다루게 될 때 양가감정(兩價感情:Ambivalence)을 갖게 된다. 첫째 감정은 그 성인 아이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아파하며 공감을 하는 것이다. 빨리 상처를 씻고 참 자기를 찾게 됐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둘째 감정은 내담자가 가해자로서 자녀들에게 중독과 폭력, 어떤 경우에는 위장된(대부분 본인은 이해하지 못함) 신념과 신앙으로 상처를 대물림하는 데에 따르는 분노다.


통제와 복종을 통해 아이에게 무엇을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자녀의 의무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구속(二重拘束:Double binding)으로 자녀의 자유를 박탈한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내제된 부모의 사랑을 외부로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의 참 자기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는 이중구속은 자녀가 자신의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참 자기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 사랑은 사랑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은 위선이다. 왜냐하면 참 자기로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로서의 부모가 피해자인 자녀에게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이 자녀의 의무라고 강요하여 자녀를 조종하게 된다면 이는 자녀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억압과 통제에 의하여 강요된 굴종이다. 이미 자녀의 자아경계선은 부모에 의해 무너졌다. 가해자인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아 참 자기를 찾는 것을 금지당하고 그 가해자인 부모에게서 살아나려는 무의식적인 생존전략에 의하여 자녀가 오히려 부모를 돌보고 사랑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부모로부터 돌봄과 사랑을 받아야 할 자녀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오히려 자신의 부모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이중구속이다. 이러한 이중구속이 강화가 되면 아이는 정신분열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중구속은 관계 속에서 갈등이나 단절, 밀착이나 융합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상처 입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의 의무를 강조하므로 자녀를 통제하는 일은 부모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는 방편이 된다. 물론 부모는 자녀에게 부모의 역할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자에 불과하며 자신의 강박을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통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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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