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1847년 ‘사랑의 실천’을 쓸 당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주관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이다. 때로는 끔찍할 정도로 객관적이기도 하다. 아, 그러나 과제는 바로 자신에게 객관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주관적이 되는 것이다.”(NB2:57, Pap. VIII1 A 165)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키르케고르에게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특히 삶에서 많은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가해자에게 더욱 주관적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키르케고르는 다른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음을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위안이자 절대적 해방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올바르게 이해된 객관성과 올바르게 이해된 주관성을 갖게 된다. 곧, 타인에게는 객관적이고, 자신에게는 주관적이 된다.”
일반적으로 국가나 단체에서 회의를 개최할 때에는 발언을 개별적인 사람에게가 아니라 의장에게 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개인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적인 문제에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모든 박해나, 고통 속에서도 개인적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누군가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합니다. 즉, 나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비켜서고, 오직 하나님께만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나는 직접적으로 그런 사람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존재 앞에서 가해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것이 나에 대해서는 객관적이 되고, 타인에 대해 주관적으로 되는 방식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모든 비열함을 이기는 승리입니다. 모든 사람은 동물이나 자연 요소와 같은 대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과는 어떠한 개인적인 관계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오직 하나님과만 개인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거칠고 무례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자신을 물어뜯는 개에 대처하듯이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SNS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뜯습니까?
어느 날, 누군가가 소크라테스에게 말했습니다.
“잔티페가 당신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으니, 당신은 화를 내야 한다.”
잔티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이자 악처였습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닭 한 마리가 똑같은 일을 했다면, 너는 화를 내겠느냐?”
키르케고르는 같은 일기에 이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일화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초연함과 객관적 태도를 설명하지만, 동시에 그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잔티페의 행동을 닭이 테이블을 뒤엎는 일과 같은 자연스러운 사건으로 간주하며,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객관성과 감정의 초월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내면적 성찰을 결여했다고 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초연함이 단순히 외면적인 초월에 머물렀다고 지적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단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를 성찰해야 합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곳에서 객관적입니다. 즉, 그들 스스로는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도, 잘못된 곳에서 주관적입니다. 그들은 작은 일 하나에도 즉시 주관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때로는 개가 자신을 물어뜯는 것조차 심각하게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짐승 같은 면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이 박해의 순간에 순교하며 죽어가는 스데반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주관적이 되고, 자신에 대하여는 객관적으로 바뀌는 것,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전하는 경건의 훈련입니다.
이창우 목사
카리스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