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 10절 ~ 12장 20절) 창조, 아담과 하와, 살인, 홍수 심판, 바벨탑에 이르기까지 세상과 인류의 역사를 기록해 온 창세기가 시야를 좁혀옵니다. 주인공 한 사람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죠. 이 주인공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훨씬 익숙한 아브람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를 끝낸 후 이어지는 창세기 11장 10절부터 족보가 등장하는데요, 족보 마지막에 데라와 그의 아들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1:31~32) 갈데아(바빌로니아) 지역의 우르에 자리 잡고 살던 데라에게는 아브람, 나홀, 하란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일찍 사망한 하란을 대신해 하란의 아들 롯이 데라와 한 식구가 되었죠.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자녀가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분가하지 않고 데라와 함께 지내며 조카 롯을 형제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데라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탈무드에 남아 있는데, 창세기는 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제가 아무것도 아님을 올바르게 느끼게 하시고 이에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럴수록 주님의 선하심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이 소원은 나의 속사람이 비웃듯, 미식가가 음식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굶기는 것과 같은 쾌락주의(Epicureanism)가 아니다.” —JP: 3378, EE:67(Pap. II A 423), 1839년 5월 14일. 이 기도는 한마디로 겸손을 위한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명예를 얻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것도 얼마나 좁은 길입니까! 유튜브를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성공하기가 어려우면 ‘성공학’, ‘자기 계발’에 관한 책들이 가장 잘 팔리겠습니까? 그러다가 명예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이런 종류의 절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의 명예와 성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자 기도합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쾌락만을 추구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맛을 즐기기 위해, 더 환상
함이 아버지의 민망한 모습을 본 후 장막을 나가 셈과 야벳에게 알리자 두 사람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로 장막에 들어가 아버지 몸을 가렸죠. 그런데 함은 왜 처음 발견했을 때 아버지 몸을 가려 드리지 않았을까요? 경솔했다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함이 일부러 아버지 수치를 드러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함과 노아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어느 정도 설명됩니다. 서로를 향한 나쁜 감정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상처를 주고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알게 된 후 노아가 보인 행동도 지나쳤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지목해 그가 ‘형제의 종들의 종’, 그러니까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방주라는 기막힌 구원을 직접 경험한 이 가족의 인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구절입니다. 이 정도면 꽤나 막장이거든요. 노아가 하는 일을 보면 자기 행동에 대한 반성이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무지막지한 저주를 내렸죠. 함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 노아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자녀는 부모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함은 노아의 또 다른 모습입
(창세기 9장 18절~11장 9절) 다시 시작된 일상이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겪었더라도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사실이 무서우리만큼 가혹한 우리 삶이죠. 홍수가 쓸고 지나간 황무지에서 집을 세우고 옷을 지을 뿐만 아니라 오늘 필요한 양식을 위해 농사든 사냥이든 되는대로 해야 했지만 절대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홍수로 생태계가 전부 바뀌어 농사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한 데다 동물을 사냥하려고 해도 방주에서 나온 직후에는 동물 숫자가 워낙 적었을 테니 양식 구하기가 어려웠겠죠. 방주에서 살아남은 동물이 많아야 종류마다 암수 일곱 쌍이었으니 흩어지고 나서는 잡아먹고 싶어도 찾을 수조차 없었을 겁니다. 이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은 많았고 마음의 여유는커녕 허탈한 마음을 가질 틈조차 없었을 겁니다. 창세기는 당시 노아 가족이 겪은 일을 단 한 문장, 아니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창 9:18~19) 창세기는 ‘퍼지니라(퍼져 나갔다)’라는 한 마디로 홍수 이후 노아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9:14~15) 다시는 온 세상에 홍수를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명령, 사람이 내린 선택에 책임이 부여된다는 말씀, 심판을 피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주시리라는 선언을 담은 상징물로 무지개가 등장했습니다. 무지개가 생기는 과학적인 이유를 모르더라도 비가 갠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는 기분은 참으로 황홀합니다. 비를 뿌리던 먹구름이 살짝 비켜선 자리에 햇살이 비치고 무지개가 걸리는 장면은 도시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관이죠. 신비로운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 언약을 생각한다면 정말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무지개에 담긴 언약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축복과 은혜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곤 합니다. 이것이 무지개 상징의 전부는 아니죠. 무지개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새 언약이 홍수 심판에서 나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은 두말할 것 없이 인간의 죄 때문이었죠. 무지개는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
키르케고르는 1847년 ‘사랑의 실천’을 쓸 당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주관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이다. 때로는 끔찍할 정도로 객관적이기도 하다. 아, 그러나 과제는 바로 자신에게 객관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주관적이 되는 것이다.”(NB2:57, Pap. VIII1 A 165)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키르케고르에게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특히 삶에서 많은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가해자에게 더욱 주관적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키르케고르는 다른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음을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위안이자 절대적 해방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올바르게 이해된 객관성과 올바르게 이해된 주관성을 갖게 된다. 곧, 타인에게는 객관적이고, 자신에게는 주관적이 된다.” 일반적으로 국가나 단체에서 회의를 개최할 때에는 발언을 개별적인 사
(창세기 7장 11절 ~9장 17절)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도 사람과 악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던 노아라고 해도 마음에 악이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8장 21절이 이것을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악하다는 이유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악이 발견될 때마다 심판한다면 애꿎은 땅만 계속 고통받을 테니 차라리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죠.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 인간과 하나님 관계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하셨는데요, 9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9장 1절 말씀은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말씀과 비교됩니다. 생육, 번성, 충만은 그대로지만 정복과 다스림은 없어졌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9장 1절 말씀은 홍수 이전 삶의 회복을 허락하셨을 뿐, 특별한 축복을 더 주셨다고
오사카중앙교회의 캠프 시작 전까지, 준비할 게 너무 많았습니다. 라벨링 작업, 풍선 꾸미기 등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정신도 없었고, 끝이 보일 듯 하면 추가되는 작업에 팀원들도 서서히 지쳐갔습니다. 그러나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는 팀원들을 보며 저의 첫 선교를 이런 멋진 팀원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그들을 보내주심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캠프 전 날, 제 인생 처음으로 노방 전도를 했습니다. 평소에 전단지를 나눠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는 분들을 보며 부담스러운 마음에 그냥 지나쳤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저 또한 아이들에게 전도할 때에, 아이들이 무시하고 지나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기도하며 학교로 향했습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밝은 모습으로 전단지를 받아줬고 캠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전단지가 부족할 정도로 아이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나였지만, 준비해 간 멘트와 바디랭귀지로 소통했던 것 같습니다.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저 아이들을 통해 일본 땅에도 복음화가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12) 지금도 바다는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넓기도 하지만 가장 깊은 곳 수심이 10km가 넘을 정도니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바닷물 전체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물로도 지구 전체를 덮기엔 부족합니다. 30%에 해당하는 육지 높이가 바다보다 높기 때문이죠. 육지를 포함해 지구 전체를 모두 덮을 정도로 큰 홍수가 나기 위해서는 육지 뿐만 아니라 나머지 70%를 차지하는 바다 영역까지 덮을 정도로 많은 물이 필요하니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는 바닷물 양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물이 추가로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노아 시대에 홍수를 일으킨 그 많은 물은 어디에서 왔고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혹 홍수 이전에는 육지가 낮았다가 홍수 이후에 지각 변동으로 높아지면서 지금의 바다가 되었기 때문에 물이 많이 필요 없었을까요? 아니면 지하수가 터져 올라온 만큼 육지가 낮아져 홍수가 됐다가 다시 높아진 걸까요? 그도 아니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궁창(창공) 위의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6장 13절부터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홍수 심판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13절은 온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데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죄지은 사람만 골라서 죽이실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홍수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신 걸까요? 노아는 왜 힘들게 방주까지 만들어 살아남아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성경에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전능하신 존재로 여깁니다. 엄청난 힘과 능력이 있으시기에 지구 같은 별을 단숨에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하늘과 땅을 뒤바꿔버릴 수도 있으며 생명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게 됩니다. ‘전능하다’라는 단어가 ‘못 하는 일이 없다’라는 뜻이니 무리가 아니죠. 하나님께서 못 하시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 핵심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한 질서에 따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질서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