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갑작스러운 부르심에도 아브람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순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아직은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12장 5절에서 아브람이 전 재산은 물론, 조카 롯을 비롯한 가족 모두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떠나는데요, 가나안이 아버지 데라가 오래전에 가려고 했던 곳이었음을 생각하면 과거 삶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먼 초보 신자 아브람에게는 과거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긴 하지만 이제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 겁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날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 계획이 이제 막 고삐를 조여오기 시작했으니 비록 지금은 방주를 나온 노아처럼 막연한 출발이지만 이제 막 도착한 가나안 땅이 주는 의미와 고향과 친척, 가족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자신이 무엇을 얻게 될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될 겁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 12:8~9)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은 벧엘 동쪽에 있는 산에 장막을 쳤습니다. 아브람 행적을 보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장막 치고 걷기를 반복하는데요, 장막에서 사는 생활 방식은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는 삶과는 전혀 다르죠. 아브람이 목축을 주로 했기 때문에 정착하기보다 장막 생활을 선택했을 겁니다. 양이나 염소 등 가축 키우는 일을 주로 했던 아브람 가족은 신선한 풀을 공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축을 이동시켜야 했기에 들판에 장막을 짓고 사람과 가축이 함께 사는 편이 나았죠.
이곳에서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었으니 형식과 내용을 모두 갖춘 예배는 아니었겠죠. 두서없이 신앙을 표현하는 원초적인 예배였을텐데 아브람의 순수한 신앙이 표현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겁니다. 1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셨던 명령을 이제 완수했다는 안도감이 예배 동기가 됐겠죠. 앞으로 창세기 속 아브람 행적을 따라가면서 그가 드리는 예배를 계속해서 보게 될 텐데요, 아브람은 자신의 믿음이 성장할 때마다 예배를 드림으로써 확인해 줍니다. 예배가 아브람 믿음의 성적표인 셈이죠.
비교적 좋은 출발을 보인 아브람이었지만 삶에는 신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9절에서 아브람 가족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건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목축이 주업인 아브람은 가축에게 먹일 신선한 풀이 자라는 땅을 언제나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 풀로 가득 찬 초원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 았으니 풀이 많은 땅을 찾는 일이 생계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했죠. 한 곳에 자리 잡아 가축 떼에게 풀을 먹인 후에 다른 땅을 찾아 이동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남쪽으로 가게 된 겁니다. 남쪽을 택한 이유를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미움을 사 남쪽으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있고 기근 피해가 비교적 적은 곳을 찾는 과정에서 남쪽으로 가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둘 다 정답일 수도 있겠네요. 믿음이 생겼지만 고단한 삶은 그대로였고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그를 남쪽으로 내몰았을 겁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땅, 애굽이 있었죠.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애굽에 처음 내려갈 때는 그 땅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기근만 잘 넘기면 돌아오고 싶었겠죠. 설령 정착하고 싶어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이 나일강이 준 혜택으로 기름진 땅을 가지고 있어서 풍요롭긴 했어도 절대 권력을 가진 왕과 기득권 세력이 오랫동안 지배한 국가였기 때문에 이방인 이 자리 잡기는 여간해선 어려웠습니다. 가나안은 특정 왕국이 아니라 각 지역에 자리 잡은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느슨한 사회였기 때문에 아브람 같은 이민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얼마든지 있었죠. 기근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으니 상황만 좋아지면 곧장 가나안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람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진 않았죠.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창 12:14~15)
아브람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간직하고 있는 아내 사래였습니다. 애굽의 힘 있는 자들이 사래가 마음에 들어 소유하려 한다면, 아브람부터 죽이고 사래를 차지하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사래를 여동생으로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래를 차지 하고 싶은 이들이 오빠(아브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평소보다 신사적으로 접근할 테고 이를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 사래와 자기 목숨을 함께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제법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아브람 생각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래의 외모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애굽 왕 바로에게까지 소문이 들어가고 말았거든요. 상대가 귀족 정도면 모를까 왕이라면 협상이고 뭐고 없습니다. 제안을 거절하면 사래를 지키기는커녕 가차 없는 죽음이 뒤따르겠죠. 생존을 위해 들어간 애굽이 파멸의 땅이 됐고, 사래는 바로의 아내가 되어 궁으로 가게 됐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내 대신 많은 숫자의 노비와 가축이 선물로 주어졌죠.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창 12:19)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안에 재앙을 내리시자 바로는 사래를 아내로 삼은 일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아차렸고 서둘러 조사한 끝에 그녀가 아브람의 아내였음을 밝혀냅니다.
이후 사래를 아브람에게 돌려보냈음은 물론 아브람 일행이 무사히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추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래를 아내로 삼으려 했을 때 아브람에게 내렸던 노비와 가축을 회수하지 않은 걸 보면 추방이라기보다 애굽에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나라 밖으로 나가 달라고 부탁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덕택에 아브람 가족은 바로에게 거짓말을 하고서도 많은 재물과 함께 당당히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어쨌든 사래를 지켜냈고 그의 여생뿐만 아니라 자녀의 삶까지 풍족하게 해줄 정도로 많은 재산을 확보하게 됐죠.
가장 중요한 소득은 신앙 경험이었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하란에서 들었던 부르심이 전부였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 길을 떠났고 가나안에 이르러 예배를 드렸어도 하나님은 아직 멀리 계신 분이었습니다. 신앙과는 별개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만 했죠. 그렇게 아등바등 살다가 애굽에 가게 되어 포기하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겁니다.
그것도 애굽 왕 바로의 의지를 꺾을 만큼 극적인 방법으로요. 하나님께서 내 삶에 직접 개입하시는 체험은 삶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입니다. 새롭게 얻은 종과 불어난 가축, 그리고 재물을 가득 실은 나귀와 낙타 떼를 몰고 애굽 땅을 나오는 아브람 마음에는 그 모든 부유함보다 훨씬 가치 있는 신앙 성장이 자리하고 있었죠.
애굽에서 아브람이 겪은 일은 400년 후 벌어질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간 것처럼 야곱과 열한 명의 아들도 기근을 피해 요셉이 있는 애굽 땅으로 피했죠.
애굽에서 사래의 지위가 아내에서 동생으로, 아브람의 아내에서 바로의 아내로 바뀌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위도 총리 가족에서 노예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해결해 주신 일도 같죠. 아브람을 위해서는 바로와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할 때는 열 가지 재앙을 바로와 그의 집은 물론 애굽 온 땅에 내리셨습니다.
탈출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온 일도 비슷합니다. 아브람은 바로가 준 재물을,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주민에게서 얻은 재물을 받아 나왔죠. 마지막 공통점은 행선지입니다. 아브람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 애굽을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갔거든요. 이처럼 아브람의 애굽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겪게 될 출애굽을 정확하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 드라마의 완벽한 예고편인 셈이죠.
아브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불행도 조금씩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말이죠. 아브람 못지않게 사래도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시아버지를 따라 우르를 떠난 이후 오랜 시간 떠돌이로 살아야 했고 기근을 피하려 애굽에 가서는 바로의 아내가 될 뻔한 기막힌 일도 당했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위기를 벗어났지만, 아브람과의 관계가 진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여동생으로 소개하겠다는 아브람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만 보면 아브람이 사래를 희생시켜 자기 생명을 지키려 했던 셈이니까요. 남편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때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바로의 아내가 될 뻔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아브람을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자신의 희생으로 각종 재물을 실은 가축을 앞세워 가나안으로 향하는 아브람 뒷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브람과 사래의 미묘한 갈등은 이후 펼쳐질 후사 논란과 겹치며 새로운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