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문헌 가운데에는 특정 계절을 위한 음악들이 간혹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호두까기인형이 대표적인 예이고 헨델의 메시아 또한 성탄시즌에 집중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음악들을 작곡한 작곡가들은 딱히 성탄음악이라고 특정 짓거나 계절을 크게 의식하고 이 작품들은 만든 것은 아니다. 다만 연주자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이 작품들의 연주시기를 성탄시즌에 집중한 것이 유례가 되어 크리스마스 때에 연주되는 음악들로 제한해 두었다. 그러나 작곡가 자신이 계절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음악들도 다수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비발디의 사계이다. 관현악 모음곡 형식의 음악들이 이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세 악장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음악들은 계절을 시작할 때마다 자주 연주되고 또 방송 매체에서도 계절을 알리는 공식적인 음악으로 자주 전파를 타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비발디의 “가을”은 이 짧고 아쉬운 계절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음악이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였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빨간 머리 사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였지만 사역보다는
(1)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해 앞선 글에서 필자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것에, 그리고 예배도 시대와 관계없이 기획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과연 기획이 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의 이유는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정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예배철학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필자는 그 중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다. 어떤 만남이든 소중하지 않은 만남은 없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필자도 아내와의 결혼 전 교제하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아내의 반응이 달랐던 것을 기억한다. 이 밖에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준비할 때, 우리는 그 만남을 잘 준비해야한다. 그 만남이 지나가는 한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만날수록 더 깊어지길 원한다면, 만날수록 더욱 지루하고 진부한 만남이 아니라 만날수록 더 새로워지길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기대한다면 말이다. 예배는 이와 비교할
주일 오후에 스코틀랜드 출신 헨리 라이트(Henry Lyte) 목사는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영국 브릭스햄의 바닷가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산책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산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질환을 앓던 라이트 목사는 갯바람을 쐬면 건강이 회복될까 해서 30세였을 때, 이곳으로 옮겨와 작은 교회를 맡았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도 그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는 그가 영국을 떠나 따뜻한 이탈리아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라이트 목사는 그날 오전 주일예배에서 자신과 20년 넘게 함께해온 교회에서 마지막 성찬식을 행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들릴 듯 말 듯 힘이 없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죽음을 맡기고 우리가 맞게 될 엄숙한 시간을 준비하기를 바랍니다”라며 설교를 마쳤을 때 모두가 진한 감동을 받았다. 예배가 끝나고 그는 20여 년간 걸어온 친숙한 바닷가에서 마지막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탈리아에 가면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삶과 죽음 그 어디
‘예배’와 ‘기획’이라는 단어는 어찌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기획’은 뭔가 인간적인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 세상도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또다른 표현으로는 기획)속에 만들어졌으며, 성경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닐까? 조금 돌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주 지키는 교회력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된 좋은 기획 프로그램이 아닐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드렸던 ‘회당’ 예배와 ‘성막’예배에서도 예배에 대한 정해진 순서와 내용이 있었다. 모든 것을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에는 다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지금의 ‘큐시트’라는 형태가 없었을 뿐, 당시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따른 예배 순서에 그에 관련된 준비가 있었다. 지금도 그 어떤 교회이든 ‘주보’를 보면 예배의 순서와 예배 시작시간이 있다. 그리고 각 순서에 따른 직관적, 또는 암묵적으로라도 할당된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만찬을 할 때면 집례자와 분잔, 분병에 따른 위치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이며 분잔과 분병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순리가 참 고마운 여름의 끝자락이다. 이제는 제법 가을을 예감할 수 있는 바람과 함께 그렇게 치열했던 여름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다.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리들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을 찾아보다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의 피아노 음악을 다시 만났다. 27세의 청년 슈만이 음악으로 표현한 삶의 환상과 현실에 대한 진술이 담긴 환상소곡집 작품 12번은 피아노 소리를 아름다운 시적 서정으로 표현한 8곡의 주옥같은 소품들을 모아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슈만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를, 그녀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이었던 비크씨의 극심한 반대로 서로를 보지 못하는 시기에 작곡된 음악으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몽상적인 이상주의자와 다소 냉소적이지만 열정을 가진 작곡가의 양면적 내면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음악은 슈만의 음악적 미학이 농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각 곡에 제목이 붙어 있는 전형적인 낭만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세 번
덥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더운 여름철은 무엇이든 시원한 것을 찾게 된다. 삼복더위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더운 요즘에는 입음새와 먹거리는 물론이고 잠시 서있을 때에도 시원한 그늘만을 찾게 된다. 기온과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도 높아지는 여름철에는 신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많이 지치게 된다. 몸은 처지고 마음은 무겁고 조금만 움직여도 더위에 지치는 여름을 잘 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도 삶에서 꼭 필요한 지혜일 것 같다. 덥다고 해서 일상을 멈출 수도 없고, 또 무조건 시원한 곳만 찾아다닐 수도, 차가운 것들만 곁에 둘 수도 없는 여름에는 무엇보다 매사에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평정과 균형을 위한 음악을 생각하다가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의 핑갈의 동굴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됐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에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추위를 느낄 정도로 시원함을 느낄 수 있기에 제목부터가 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한 이 음악은 멘델스존의 여행의 결과물 중에 하나이다. 독일 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명성이 있었던 멘델스
아담 가이벨(Adam Geibel)은 어릴 적 눈병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그에겐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신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한창 달콤한 신혼의 꿈을 펼칠 즈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위가 다니는 제철회사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여러 명이 죽었고 사망자 명단에 사위의 이름이 들어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가이벨은 딸과 함께 사고 현장에 가서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사고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딸이, 또 사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겨왔던가. 어찌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 눈도 모자라 딸의 사랑까지 앗아간단 말인가.” 가이벨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스러운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가이벨은 절친한 친구인 찬송작가 찰스 마일즈(Charles Miles)를 찾아갔다.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가족에게까지 이런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살다보면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을 겪게 되는 불가피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일방적이고 본인 중심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과 대면하게 된다. 그뿐인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분노하고 답답해하며 그런 부당함을 성토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행동에는 주저하거나 포기하면서 더 큰 분란과 혼란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물론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고 손해보고 싶지 않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을 것이고 또 비난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불의나 부당함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분명해야 하고 상황을 보는 시각에는 일관되고 균형 있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제4차 산업혁명을 지나고 있는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가 바로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않지만 큰 시야로 상황을 보는 통찰력이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사고력일 것 같다. 일관된 원칙과 균형은 창작 예술에서도 필요한 것으로 작품의 정통성과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나오는 작품에 시대를 초월하는
올해도 절반이 다 지나고 한해의 후반기를 맞으며 시간의 빠름을, 또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무엇을 성취하였는가보다 어떻게 이루어내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자세와 방법으로 그 결과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다. 나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타인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를 서슴치 않고 나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타인을 향한 무례한 독설을 솔직함이라 포장하기도 한다. 그 뿐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똑 같은 상황이나 이슈에 대해 손바닥 뒤집듯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도 상황의 변화에 따른 유연성이라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본향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는 여행이고 이 세상은 그런 방랑자의 여정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행동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러 살 것 같다. 이 삶에서의 영원한 안락을 위해 기득권을 쟁취해야 하고 그렇게 얻어진 나의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 중 하나가 자연 환경이고 또 그중에서 우리가 누리는 큰 은혜는 음악이다. 음악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비롯한 여러 악기로 연주할 때 또 다른 언어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연주자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적 경험을 전달할 수 있다. 연주자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 속에서 찬양을 찾아내고 표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가 연주하는 음악 역시 은혜와 감동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훌륭하게 작곡된 교회음악이라도 연주자의 마음에 십자가의 감동이 없으면 은혜로 전달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음악을 대하는 마음과 전달하는 시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다문화 중심의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좋은 음악, 마음에 선한 영향력이 될 수 있는 음악은 작품성과 함께 연주자의 자세와 영적 상태도 함께 판단되어야 하고 이것은 다음 세대에게 음악을 전달할 때 깊이 고민하고 고려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모차르트(W.A. Mozart, 1756-1791)의 엑술타테, 유빌라테는 특별히 연주자 어떤 자세와 목적을 가지고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