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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12)

조선의 “새빛” 선교사들-12
백정수 목사
더가까운교회

흥선 대원군이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이유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여러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 언급한 이유 외에 다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퀴즈 하나를 내본다. 조선의 정궁(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과 법궁(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은 무엇일까? 대부분 사람들이 경복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로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 맞다. 그러나 경복궁이 왕의 거처로 사용된 것은 조선왕조 518년 동안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경복궁은 조선의 상징적인 궁일 뿐, 실제적으로 왕이 거처하고 실질적인 정사를 보던 곳은 대부분 창덕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완공된 지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만다. 또 그 이후 여러 가지 사건으로 경복궁은 법궁의 위치를 잃게 된다.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 전인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고, 더구나 안타깝게도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백성을 버리고 파천한(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 선조로 인해, 성난 군중들이 궁내에 진입하여 보물들을 약탈하고, 특히 노비문서가 있는 장례원과 형조와 같은 관서에 불을 궁궐 곳곳에 질러버렸기 때문이다. 


1392년의 조선 건국 이래, 유례없는 대화재로 궁궐의 모든 곳이 잿더미로 소실된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났어도 조선의 재정 문제로 복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518년의 조선 역사에서 약 270년 동안 경복궁은 공터로 방치되어 있었다(일반인은 당연히 출입 금지였고, 오랜 시간 동안 북악산과 인왕산에 거주하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서식하는 곳이 됐다.).


그런 이유로 경복궁이 복원되기까지 270년 동안 조선의 법궁 역할은 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조선왕조 518년간 경복궁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시기는 창덕궁보다 짧다. 즉 경복궁은 조선 전기와 고종 시기에만 궁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반면에 창덕궁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망국까지 계속 존속했던 유일한 궁궐이다.
창덕궁은 조선의 정궁은 아니지만, 왕들이 오래 거처했던 법궁이었으며, 서울의 5대 궁궐 중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궁궐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정궁으로 여기며 선호하기도 한다. 우리 목사님들도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가족들 혹은 교인들과 창덕궁을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


흥선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입지 강화와 체제 안정을 위해 집권 다음 해인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다. 당시 소요되는 재원은 조선 1년 예산의 10배가량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원납전(경복궁 중건을 위한 강제 기부금)을 걷고 당백전(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된 화폐)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초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조선 경제가 망가졌지만, 그나마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던 조선에 외국 문물들이 들어와서 치명타를 안기게 됐다. 일본 및 청나라 상인들이 개항 훨씬 이전부터 싸고 품질 좋은 공산품을 밀무역(허가받지 않은 부정 수출입) 형태로 들어와 팔았으며, 이에 쌀과 금 등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나라에 돈이 메말라가는 현상이 관찰됐다. 이때가 대원군 집권 3년 차였다. 


서양 물건들이 점차 전국에 가득하게 됐다. 서양 물건이란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공산품들인데, 조선에서 수공업으로 만들 제품들이 품질이든 가격에서든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농기구, 의류, 염료 등등 생활과 관련된 모든 공산품들이 외국제로 점차 바뀌었고, 이것을 지불하느라 쌀이나 금, 은 등 원료는 고갈되어 갔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 상품 열 가지 가운데 ‘비단과 칠기 등’과 같은 공산품이 아홉이었고, 외국으로 나가는 우리 상품은 열 가지 가운데 아홉 가지가 ‘쌀, 콩, 가죽, 금, 은’과 같이 평소 생활에 필요한 보화들이었다. 그러니 나라가 척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개항을 해서 무역을 풀어버린다? 이것은 대원군뿐만 아니라 온 조선인이 들고 일어나 반대를 할 형편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예측한 대로, 나중에 대원군이 물러나고 개항이 이루어지자 과연 조선은 무역 적자로 망하기 직전이 된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당시 조선이, 얼른 개항했으면 서구 문물 받아 강해졌을 것이라는 소리는 상당한 무지에 가까운 몽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이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원군의 서양 세력 배척은 날로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서양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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