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NTV 다큐멘터리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과 ‘땅 끝의 증인들-나는 섬 선교사입니다’가 제13회 한국기독언론대상에서 각각 기독문화부문 최우수상과 나눔기부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기독문화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연출 유진주PD)’은 교회학교를 떠난 10대 아이들의 진솔한 속마음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많은 이들에게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눔기부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땅 끝의 증인들-나는 섬 선교사입니다(연출 윤은영PD)’는 완도지역 33개의 작은 섬마을에 있는 53개 교회를 배를 타고 방문하며 열악한 낙도 목회자들의 사택을 수리해주고, 지역 독거 노인들의 생활을 돌보는 이정환, 신영삼 선교사 부부의 삶을 다룬 이야기다.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묵묵히 예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참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있는 다큐멘터리다. 한국기독언론대상의 CGNTV 수상작 들은 CGNTV 웹사이트, 유튜브 CGNTV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범영수 차장
영화 ‘사비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 시대’가 오는 11월 25일 극장에서 관객을 찾아온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사비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 시대’는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의 아내이자 국제 선교단체 ‘순교자의 소리 The Voice of Martyrs’ 공동 설립자인 사비나 웜브란트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비나 웜브란트는 1913년 루마니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명문인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을 다녔던 재원이었다. 그녀는 리처드 웜브란트와 결혼한 이후 기독교로 회심, 나치와 공산주의 치하의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며 사역했다. 사비나 역시 남편처럼 3년간 감옥에 투옥되는 등 많은 고난을 당했다. 이후 남편 리처드 웜브란트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 국제 선교단체인 ‘순교자의 소리’를 창립하고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전 세계 15개 국가의 ‘순교자의 소리’를 통해 전 세계 지하 교회들을 지원하며 동역했다. 영화 ‘사비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 시대’는 쾌락을 즐기는 야심만만한 무신론자였던 그녀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한 증인의 삶을 살게 됐는지 그리고 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CBS는 영화 ‘십계’의 헤리티지 ‘오 신실하신 주’ 콜라보레이션 뮤직비디오 영상을 최초 공개했다. ‘십계’는 성경 속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기적 같은 여정을 다룬 바이블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이번 영화 ‘십계’는 인기 가스펠 그룹 헤리티지가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에 이어 CBS와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춰 OST ‘오 신실하신 주’를 불렀다. 이집트 시대를 연상하게끔 하는 웅장한 세션과 모세의 고백을 온전히 묵상하게 하는 가사로 예비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영화 속 ‘모세’의 위대한 여정과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헤리티지의 서정적인 노랫말이 어우러지며 진한 여운을 예고한다. 갓난 아기였던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어머니 ‘요게벳’의 모습에서 ‘모세’와의 애절한 서사가 묻어나며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하는 가운데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란 가사를 통해 고난 가운데 방패가 돼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끼게 한다. 성장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출애굽의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담아낸
언제나 새해맞이는 늘 가슴 가득한 설렘으로 일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삶에 대한 소망이 가득한 시기였다. 그러나 올해 2021년은 그런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붙잡혀 답답하다는 느낌마저 들 만큼 큰 설렘이 없이 시작된 듯하다. 그만큼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일상의 정체감에 지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가고 벌써 새해를 맞고 한 달이 지났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고도 힘든 펜데믹 상황에 함몰되어있지만 말고 이제 우리는 환경을 넘어서 삶의 균형을 다시 찾는 회복의 일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바로 2021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며 이런 축복의 경험을 기대하며 다시 일어서야 한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는 일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기쁜 일, 슬픈 일, 억울한 일, 고마운 일, 가슴 아픈 일 등 사람과 사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더 많이, 더 오래 기억한다. 감사하고 고마운 사람보다는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더 강렬하게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기쁜 일을 함께 한 사람, 도움을 준 사람, 자신에게 진심을 다해 대해주었
답답하고 힘든 여름을 지나 어김없이 가을이 왔고 그 가을은 잠시 동안 아주 찬란한 풍경을 선사하고 떠나가고 있다. 비대면의 시대가 체질화되어 가고 그로 인한 많은 변화에 적응하며 사고와 정서도 서서히 변하고 있는 불확실한 시대에도 자연은 여전히 그대로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지만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단풍이 드는가하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부스러지고 바람결에 사라지는 낙엽을 애달파할 겨를도 없이 늦은 가을비와 함께 겨울은 성큼 우리 곁에 와있다. 빠르게 변화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고 예측이 가능한 자연의 순환을 보며 사람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는 절절한 사랑의 약속도, 언제나 한결같겠다던 신의의 다짐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해버리고 마는 마음의 연약 함이 자연 앞에서 참 부끄러워지는 가을이다. 눈앞에 보이는 지금의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비겁해지고 옆의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많이 가지고 누리고 싶은 욕심에 신념과 의리를 아무 망설임 없이 버려버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접할 때마다 마음은 더 추워 지고 허전해 찬바람만큼이나 스산해지는 가을이다. 그러나 절망할
요즘 들어 평안이라는 말, 혹은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특히 민족 대 명절을 지나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작은 평온함이 이다지도 귀한 것인가를 새삼 알게 됐다. 공기가 그러하듯, 햇볕을 당연하게 일상 속에서 누리며 살았듯, 자유함과 평온함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그것에 대한 가치를 크게 두지 않았던 우리들의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을 수없다. 코로나19로 겪는 상황도 그렇지만 학령인구 절벽의 심각한 상황을 지나가고 있는 대학가는 이제 본격적인 입시 기간을 맞아 평온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맞닥뜨린 대학들, 특별히 지방대학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신음소 리는 남의 일이 아니다. 언론에서 앞 다투어 다루고 있는 기사가 지방 대학들의 어려움이고 그들이 예측하는 결과는 지방대학의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학은 더이상 형설의 공을 쌓는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교육의 블랙 홀”이라고도 하고 대학교수를 영업사원에 견주어 표현하는 그야말로 웃픈(?)현실이다. 그렇게 구걸하듯 모집된 학생들의 자존감이나 애교심은 매우 낮고 가르치는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기독교가 경시되고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은 답답하다. 물론 일제 강점기와 혹독한 전쟁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기독교의 가치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교회는 어려움 속에서 더 단단해지고 믿음의 기준은 분명했었다. 신앙의 절개를 지켜내고자 갖은 시련을 겪었지만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많았고 그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교회는 세워지고 성장했다. 역설적으로 고난과 시련이 혹독하고 그 수위가 높을수록 신앙의 사람들은 굳건해졌고 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나라의 경제 수준은 높아졌고 생활은 윤택해졌고, 문명은 상상 그 이상으로 발달한 현시 대의 교회는 오히려 위축되고 성장과 부흥은 멈춰진 듯한 이유는 무엇일까? 급진적인 환경의 변화와 사고의 가치관의 현저한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생각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관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을 위해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 삶의 주인이 여호와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반응이 요즘처럼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시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소수만이 갖는 느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인으로 바르게 사는 것 자체도 많이 힘든 시기다. 겉보기에 정의롭고 명예롭더라도 이해관계가 맞물린 상황에서의 모습은 전혀 다름을 목도할 때마다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과 마주하곤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상이라는 명제를 더 절실하게 고민하게 하는 여름이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근본주의적인 정죄함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녀라는 특권의식 때문에 무작정 관대해서도 안 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하는 중요한 단어는 균형이다. 율법의 적절한 적용과 사랑을 기초로 한 관용의 절묘한 균형, 올바른 지적과 사랑의 용서 사이의 균형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울지 않게 중심추와 같은 역할을 한다. 문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부딪혀 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과 잣대는 늘 유동적이다. 관계의 거리에 따라, 손익의 계산법에 따라 변한다.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기도 하고 과거에는
이제 겨우 끝나는 줄 알았다. 전염병의 어둡고 긴 터널도 끝이 보인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런데 갑자기 더 무서운 전파력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묶어버리는 코로나-19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답답함을 경험한다. 거의 반년을 끌어온 팬데믹 상황은 우리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고 있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생활 패턴과 습관마저 수정하고 있다.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온전하게 안전한 나라도, 도시도, 장소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조심조심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으로 견디며 살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에 기막혀 한다. 막막한 현실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라틴어 문장이다. 바로 종교개혁의 5대 표어 중 하나인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란 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것,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은혜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힘으로 그 어떤 일도 완전히, 온전히 할 수 없음이, 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실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우리의 얄팍한 지식도, 그렇게 경이롭게 바라보던 과학의 논리도, 생명의 신비한 비밀의 영
아득한 기억 속에 묻혀있는 젊은 날 어느 지점에서 만난 시의 제목이 갑자기 기억 밖으로 나온다. “홀로서기”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처음 대하고 읽으며 마음을 채우며 공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정윤님의 시, “홀로서기”는 맹렬하게 공부하고 있었던 메말랐던 시기에 감성을 깨워준 시였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아마 이렇게 시작한 시였을것이다. “둘이 만나 서는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라는 표현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며 감동했다.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외우며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 시절에는 홀로 지내거나 혼자라는 것은 참 서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정서였는지 이 시는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시간이 지나는 것만큼 환경도, 사람도 변했다. 요즘은 오히려 홀로인 것이 편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일반적이 됐다. 더군다나 코로나19의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등으로 더욱 홀로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홀로 서기를 훈련할 필요도 없이 그저 혼자서 즐겁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