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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한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보배

 

지난 주 대예배 때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다. 슬퍼서 나는 눈물은 분명히 아닌데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하는 기도 때도, 기도가 끝나고도 계속 났다. 손수건을 꺼내어 옆 사람들 모르게 닦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인 것 같은데, 무엇이 어떻게 감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배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야 그 원인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삶을 살아왔다. ‘다사라기 보다 다난한 삶이었다. 나이 삼십을 넘겨 대학에 입학했고, 사십에 유학을 가, 오십에 대학의 전임교수가 됐다. 이렇게 말하면 多事한 것도, ‘多難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교통이 불편한 농촌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며 도시에 있는 야간대학에 다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가용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타는 때였고 버스는 시간이 잘 맞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트럭이건 승용차건 학교 옆 국도를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차종을 가리지 않고 손을 들어 얻어 타는 일도 많았다.

 

유학은 대가족에다 아이들의 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야 할 때에 갔다. 그러니 가정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힘들게 한 것은 공부를 마친 뒤의 취직에 대한 걱정이었다. 교수자리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는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방법은 따로 없었다. 기도밖에 없었다. 죽기 살기로 기도했다.

 

귀국 후에는 금식을 너무 많이 하여 몸이 쇠약해지기도 했고, 기도하다가 탈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학에 서류를 내면 그런 족족 떨어졌다. 이상한 것은 이름 있고 큰 대학에는 면접까지 가는 일이 많았지만, 이름 없는 작은 대학은 서류심사에서 모두 탈락되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뽑을 사람을 내정해 놓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서류를 내다보면 이번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의 탈락은 정말 힘이 든다. 이런 때도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막상 결과는 탈락이었다.

 

그때의 충격 여파는 몇 년이나 갔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됐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눈앞이 새까매지는 일을 당했다. 죽음보다 가혹한 형벌이었다. 역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그럼에도 심적 고통으로 두세 달 동안에 체중이 9킬로나 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어둡고 긴 터널에 불과하여 지나가고 말았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노후에 대한 불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없는 살림에 유학을 했으니 학교를 옮기며 퇴직금을 모두 찾아 써 버려 연금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이다. 믿는 사람이 언제라고 다르겠는가. 기도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년을 6개월쯤 남겨 두고 국회에서 연금합산법이라는 것이 통과되어 지금 연금을 받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구구하게 다는 늘어놓을 수 없어 몇 가지만 썼지만 참으로 많은 일을 겪으며 그때마다 기도도 많이 했다. 자신을 가리켜 많은 기도를 했다는 것은 팔불출 같지만, 그래도 필자는 그때마다 기도를 적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취직을 위한 기도 때에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있는데도 만약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도가 부족해서라곤 말씀하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필자의 기도는 바른 것이 되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쓰는 막무가내기의 떼에 불과했다. 물론 이루어 주시면 이리이리 살겠다고 하는 기도도 같이 드린 게 사실이지만 중심은 항상 필자 자신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필자가 드린 기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 주셨다.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 늙어 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욕심을 내려놓기가 젊었을 때에 비해 쉬워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욕심보다 큰 적은 없으니 얼마나 큰 은총인가. 노욕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젊었을 때의 욕심보다 훨씬 위험하지만, 그것은 마음이라는 꽃밭의 잡초를 뽑지 않고 방치해 둔 결과이다. 뽑으려고만 한다면 젊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쉬운 것이 노년의 욕심이라는 잡초이다. 살날도 많이는 남아 있지 않고 자식들도 다들 성장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제 그 욕심이라는 것을 조금은 내려놓은 것 같다. 목까지 가득했던 욕심을 조금 비워냈을 뿐인데, 운신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 없다. 기도도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고 막무가내로 하나님의 목이라도 조르듯 하지는 않는다.

 

자신보다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춰 하는 기도의 비율이 높아졌다.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 필자는 언젠가 이 난에 소몰이가 소를 몰아가 듯 자신을 여기까지 몰고 오셨다고 하는 의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니 두세 달 동안에 체중이 9킬로나 줄 정도로 심했던 심적 고통도 은혜였다. 그때는 죽음보다 가혹한 형벌이라 생각되었지만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필자는 그 당시도, 자신의 아픔을 하나님께서도 같이 아파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제 와서야 그것이 은혜요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과 소금으로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믿기 전에 풍기던 악취는 많이 탈취됐다. 자연히 그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해 주셨다. 많은 시련과 기도를 통하여 그리되게 해 주셨다. 극심한 심적 고통도 필자를 사랑하시어 하나님께서 시키신 훈련이었던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하나님보다 큰 문제는 없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모든 문제는 지나간다. 항상 머물러 있는 문제는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지 않은 문제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많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필자의 다난했던 인생이 은혜요 사랑이었듯이 지금 누군가가 겪고 있는 고통도 은혜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은혜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포기한 때문일 뿐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린 일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명하다. 누가 봐도 그럴 일이 아닌데 필자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니 미워하는 후배가 있었다. 그러니 속 좁은 필자로서는 그를 너그러운 마음으로만은 대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됐는데, 그가 필자를 대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중병으로 입원하게 됐다. 그 무렵 필자는 밤 9시가 되면 교회에 가서 두어 시간씩 기도하곤 했는데, 밤마다 판에 박은 듯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집사였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병원으로 아무개 집사를 찾아가셔서 만나 주시라는 간구가 판박이 기도에 끼어들었다. 필자 자신도 까닭을 몰라 놀랐다.

 

그 이튿날 그가 어젯밤 10시쯤 수술을 했다는 말을 교회에서 듣고 더욱 놀랐다. 성령님께서 시키신 기도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며칠 후 중환자실의 그를 문병했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필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을 과장하여 폭포처럼 흘린다고도 하는데, 정말 그렇게 줄줄 흘러나왔다.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속이 좁은 필자인지라 이해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주책맞다고 밖에 할 수 없지만 지난 주 대예배 때 흘린 눈물은 은혜였다. 그리고 후배를 보고 흘린 눈물 역시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혜였다고 생각한다.

 

눈물! 경우에 따라서는 한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보배 아닌가.

 

임 종 석 목사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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