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현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혼돈과 종교다원주의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본질적인 문제는 진리의 왜곡과 빈곤이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교회는 진리의 공급과 동력이 없어지면 세상의 어떤 조직보다도 세속화와 부패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원칙과 생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공급으로만 활기를 얻게 되는 신령한 유기체다. 다른 표현으로 많은 돈, 사람의 수, 인간 지도자의 지도력, 조직력 등도 교회의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진리의 순수함과 공급이 사라지면, 교회는 반드시 저급하고 누추한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역사가 웅변으로 증명하며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경의 진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성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은 그릇된 성경 해석으로 말미암아 인본주의 신학과 신앙때문이다. 가르치는 중요한 개념이 잘못 해석되면서 성도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혼돈을 가져온 것이다.
교회의 교회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는 이른바 “하나님의 일”이다. 내면이 빈곤한 사람이 외양에 신경을 쓰듯이 교회가 진리의 내적 능력과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면 반드시 외형적인 치장을 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외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일에 온갖 정력과 물질을 투여하는 일이다.
이것은 실상 성도의 신앙 성숙과 교회의 진로에 결정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왜 그런가? 신앙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만을 통해 삶의 가치와 기쁨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가는 진리를 외면하거나 그런 진리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내면의 공허를 느낀다.
그 결과 외형적인 일을 추구하며 “자기성취감”에 사로잡히고 내면의 공허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에게 찾아온 유대인들은 진리의 실체인 예수님을 결코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율법주의 혹은 공로주의의 포로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무익하게 바라보시고 하늘의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예수께 찾아온 유대인들이 물었다.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6;29)” 대답은 전혀 엉뚱한 차원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외형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외형적인 일과 공로를 통해 자기 성취감과 자기증명의 오류의 빠져있는 죄인 됨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이생과 역사 전체를 통해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
이때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 아니다. 예수를 몰라도 인간은 무엇인가를 믿고자 하고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무엇이든 믿고, 살아간다. 그 믿음의 대상이 우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존재로 계신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그 분을 알아갈 뿐 아니라 그 분의 주권과 능력을 전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 없음과 죄악 됨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는다는 것은 결단코 인간편의 일이 아니다. 위대한신 하나님의 일을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착각이요, 무지와 죄의 발로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고, 만사의 주관자이셔서 스스로 작정하신 일을 당신의 능력으로 성취하신다. 그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믿게 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요 인간 존재의 목적이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도 마차가지다. 인간의 자기 성취감에 사로잡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는 다시 진리 앞으로 돌아와 진정한 믿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만이 세속화를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