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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교회의 사명은 영혼구원이 최우선이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기주의와 독선에 함몰되어 복음 전파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나아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비현실적인 사역에만 치중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비롯해, 한국교회 대표 연합기관들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들의 독선과 이기주의, 명예 때문에 분열되는 갈등을 겪고 있는 현실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 하나는 요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이라는 단어다.


그것이 세속적인 복이든 영적인 복이든 아마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복이 빠진 설교가 드물고, 복이 빠진 기도가 드물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는 것이 복인지,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인지 주객이 바뀌는 경우를 흔히 본다. 기독교 진리를 오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된 그 자체가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인데, 그것을 경시하고 더 큰 복을 받겠다고 엉뚱한 일에 분주한 사람들이 많다. 이는 진리의 우물가에 앉아서 목이 마르다고 엉뚱한 포도주를 찾는 격이다. 마치 우물가의 여인처럼 영원한 생수를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보고 계속 목말라하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이런 기복적 욕구를 이용하여 거룩한 교회를 마치 복채 나누어 주는 저급한 종교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는 순진한 성도들을 오도해 무속적인 성황당 신도로 만들고 있다.


만일 세속적인 복이 그리 중요했다면 왜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겠는가? 이왕이면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셔서 요즘 일부 귀족 목회자들이 애용하고 있는 표현대로, 더 크고, 더 멋지게, 더 많이, 사역을 할 것이지 겨우 보잘것없는 어부들 몇 명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겠는가? 차라리 왕자로 오셨으면 병이 든 사람들을 일일이 손수 치료할 필요 없이 전문 의원들을 대량으로 동원하여 더 많이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자라면 막강한 재물을 동원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큰 권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회당들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실제로는 말구유로 오셔서 유대인의 종처럼 섬기며 살다가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다. 몇 일전 모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전파를 탄 모 목사는 병을 고쳐주겠다며, 많은 돈을 요구했으나 치료는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이 더 중하게 되어 죽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돈만 갈취하고, 사기 친 죄로 법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예수님 말씀 어디에도 헌금을 잘 하면 무병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자손이 잘 된다는 말이 없다. 요즘 만연하는 소위 성공주의나 성장주의는 올바른 복음이 아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해도 못 살고 병들고 파산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독교 진리를 가장 왜곡하고 오도하는 곳이 바로 공교회라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사단은 권력과 명예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면 세상에 좋은 것을 다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많은 현대 교회들은 이런 사단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고 있다.


중세교회는 세상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속인 교회다. 세상에 복음의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따르던 교회였다. 그런데 그대처럼 지금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혹은 목회자들이 또 다시 세상을 속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


강단에서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면 강 건너 불 보듯이 무심하고, 오히려 요란한 종교 쇼를 하면 쉽게 통하는 안타까운 시대에 살고 있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바른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잘 했다. 칭찬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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