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이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이 온 인류를 위한 고통이었음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새로운 신앙의 결심을 하게 된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나태했던 신앙의 모습을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다. 어버이날이 되어서야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 겸연쩍기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좋은 말이 없다. 말속에 ‘화’가 섞여 있고 ‘분’이 섞여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화를 내고 분을 내더라도 성도들은 그것을 순화시켜서 어찌되었든 세상을 밝게 만들어야 하는데 성도들 역시 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성도들이 어떤 가치와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려면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방식대로 휩쓸리어 가다가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생각해야 할 가치는 생명이다. 또 하나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부활이다. 생명과 부활에 대한 가치정립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판단과 결정을 할 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과 부활에 대해서 분명한 소신이 있지 않으면 세상의 영향으로 그 속에 묻혀버리게 된다. 바로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생활의 철학이 돼야 한다. 생명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가장 존엄한 가치를 가진다. 살아있다는 자체로 존엄성이 인정된다.
비록 어떤 사람이 비판을 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명 자체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침해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 풍조가 생명을 경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인신매매가 생명을 경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회사를 경영하든지, 다른 사람의 일을 맡아서 하든지, 어떤 형태의 일을 하든지, 생명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다루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이 많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경제적 이익이나 자신의 명예를 더 앞세우는 경우들이 있다. 또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이 바로 생명을 경시여기는 풍조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고 있는가? 그 사람의 존엄성을 생각하고 있는가? 너무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이 모두 생명 경시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언어나 행동을 했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경시 같은 일들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영혼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함부로 내뱉는 말 한 마디가 때로는 살인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생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부활을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모른다. 그래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자살하는 이유도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이 있다고 (요5;29)말씀하셨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부활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얻어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함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죄 값을 치르시지 않았다면 우리 각자가 죄 값을 치러야 한다. 사망의 부활로 살아나서 영원토록 죄 값을 치르는 것이다. 지옥에서 저주와 진노로 형벌을 받는 게 바로 죄 값이다. 생명의 부활을 가진 자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깨어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