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장애인 집회, 선교지 집회 통해 영광돌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그건 색소폰이지 않을까 싶다.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여러 방송 채널을 통해 다양한 악기에 재능을 가진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빠지지 않는 악기가 바로 색소폰이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색소폰 연주 붐이 일어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교회 모임이나 지방회 모임 등에 목회자들의 재능을 볼 수 있는 가운데 탁월한 악기 실력을 가지고 다양한 선교 사역을 전개하고 있는 목회자가 있다. 북서울지방회 조요한 목사는 음악을 통한 찬양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기부하고 있는 음악 선교사다.
유년시절의 재능, 악기가 유일한 기쁨
집안 어른의 동상이 있을 정도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앙을 품고 성장하던 시절에 조 목사에게 신선한 충격은 교회 성탄절 행사에 참석하게 된 이후였다.
교회에서 성탄절 선물을 나눠주고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해주면서 신앙을 갖기 시작한 조 목사는 음악을 접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대한 사모함과 열정을 품게 됐다.
“기타치며 노래하며, 성가대 봉사를 하면서 음악에 달란트가 있음을 발견하고 정말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누렸죠. 중학교 시절 이미 국내에는 가르침 받을 만한 선생님이 없을 정도의 기타실력을 갖었고 어떤 악기든 손에 들어오고 입에 가져가기만 하며 줄줄이 배워지게 됐어요.
다양한 악기들을 접하면서 찬송가와 복음송가 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의 음악까지 접했습니다. 당시 체계적이었던 것이 별로 없는 시절에 특히 음악을 한다는 것이 터부시 되던 시절이라 부모님 반대도 심했지만, 배고픈 시절, 음악만이 저를 채워주는 유일한 기쁨이었다”라고 조 목사는 당시를 회상했다.
고교시절 피아노와 오르간이 교회 유일한 악기여서 드럼이나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시절에 교회 문학의 밤에서 색소폰으로 “거룩한 밤”을 연주하다가 교회 모 장로에게 등짝을 맞기도 하고 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교회 음악 장르에 없어서는 안될 악기가 됐지만.
갑자기 찾아온 병마! 생명걸고 치유받아
음악이 너무 좋았던 조요한 목사는 전두환 정권 시절, 국풍 81에도 참가해보고 군악대 활동, 음악 전공자들과 함께 한 선교회 활동 등을 하며 배고팠지만 활발한 음악사역을 감당했다.
그런 와중에 목 뒷부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후발찌(피부병)가 나기 시작해 악창으로 변해갔다. 후발찌로 유명을 달리한 친지가 있다는 말에 무작정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생명 걸고 기도하는 와중에 1개월이 될 무렵, 새벽기도회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됐다.
조 목사는 “당시 뭔가 전신을 감싸도는 기운을 느꼈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뜨거웠지만 따뜻한 기분이었어요. 제 입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오고 악창이 점점 마르기 시작했어요. 놀라운 은혜였죠”라고 간증했다.
병이 치유되면서 하나님께 서원한 뜻을 이루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전도사로 22년간 봉사하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활용했던 조 목사는 청평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오랫동안 음악감독으로 헌신, 봉사했으며 서울중앙교회, 오관석 목사(현 하늘비전교회)의 부름을 받아 신학교 등록금과 생활비 전액을 오영택 목사님이 지원해 주어 침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난 2007년 1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섬기며 나누며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지낸 조 목사는 해외 선교지를 방문, 하루 10시간 이상 알바 등을 하며 자금을 마련하여 개척 선교지 교회를 돌며 자비량으로 섬기게 됐다. 중국에서는 공원에서 연주를 하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공안에게 추방당하기도 했으며 필리핀에서는 모 선교사에 선교비 전액을 강탈당하기도 했고, 대만에서는 현직 장성의 도움으로 대만 전지역을 순회하며 선교하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 선교를 마지막으로 선교 사역을 정리한 조요한 목사의 사역에 마땅히 칭찬받을 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은 시련은 계속됐다.
교회와 동역자들의 오해와 갈등…하나님께 영광돌려
선교사역을 마무리하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조요한 목사는 충격이었다. 자신이 헌신했던 선교지와 개척교회에서는 자신을 모함하고 무시하며 상처를 줬으며 함께 동역했던 이들은 자신을 ‘신천지’라고 음해하기도 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다 겪기도 했다.
그때마다 조 목사는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사단이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하기 위해서 저를 흔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여주시고 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지금은 자신의 사역을 인정하고 많은 이들이 색소폰을 레슨받기 위해 그리고 그 가운데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듣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교회를 도운 것이 이레교회의 시작
담임 목회를 돕는 부사역자를 서원했던 조요한 목사는 교회 개척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레샬롬 찬양팀(당시 8명)을 결성, 음악 선교의 비전을 품고 국내외를 순회는 순회 선교단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은교회라도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는 신념으로 준비한 첫 공연은 강원도 태백의 작은 시골교회였다. 사례비조차 준비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목사님을 안심시키고 찬양팀과 함께 도착한 교회에는 3명의 성도만이 우리를 맞이했다. 적잖은 실망감도 있었지만 집회를 시작하며 동네 분들이 점점 모여 들었고 찬양과 함께 전해지는 메시지에 감동한 이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집회 이후 이 작은 시골교회는 부흥을 경험하고 오늘날까지 지역교회로서 굳건히 성장하고 있다.
조요한 목사는 “내 생애 이런 놀라운 기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주신 우리의 재능이 이렇게 세상의 사람을 되돌아오게 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아마 그때 이레교회가 창립되지 않았나 싶다”고 회고했다. 찬양팀으로 시작한 창립한 이레교회는 첫 사역 이후 청송 서울 여자교도소 연주 예배, 서초 수서 강남 경찰서 전경들을 위한 찬양집회, 송파구 장애인 섬김 집회, 서울역 노숙자들을 위한 연주회, 지역 학교 악기 래슨 및 발표회 지도, 개인 택시 선교회 집회, 탈북자 하나원 찬양집회, 평택 외국인 정기 찬양 연주회 등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찬양에 갈급한 이들을 찾아 다니며 무료로 헌신하고 있다.
조 목사는 화려하지 않고 부하지도 않고 이름도 없는 길. 세상의 변두리로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길. 서로 따뜻이 섬기고 아껴주며 말없이 그 눈물겹게 아름다운 그 길을 나도 걷고싶다.
“사도행전 20:24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음악으로 전하는 일에 내 생명을 다바치고 싶다”며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세상이 낮고 천한 곳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곳에 음악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겠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음악은 우리의 제2의 언어라고 하죠? 그 음악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사용하심에 저는 그저 순종하고 갈려고 합니다. 말씀과 음악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통로가 되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군요”라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