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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교회 성도는 가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안산 상록수교회 이종성 목사


상록수교회 성도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목회자의 가정을 비롯해 사역자, 제직자, 성도 등을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함께 먹으며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함께 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바로 가족입니다. 개척 당시부터 가족 공동체로 하나 되어 예수를 믿고 따르고 제자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목회자가 생명을 걸고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 그것이 26년 한결같이 걸어온 상록수교회의 발자취입니다.”

 

안산에서 올해 325일로 창립 26주년을 맞은 상록수교회 이종성 담임목사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힘주어 말했다. 경기도 안산은 농민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심훈의 상록수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의 묘소가 있고 세월호 사건이 있는 단원고가 있는 곳이다.

이종성 목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하고 양육하고 제자 삼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그 때는 전도할 때 많은 전도대상자들이 교인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귀띔했다.


이종성 목사와 아내 양진숙 사모는 오직 교회중심, 성도중심의 삶을 실천하며 진정한 성경중심의 교회의 모습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쁜 목회 일정 가운데에도 교회의 중요한 경조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종성 목사는 목회자로서 설교가로서 가르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늘도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그는 설교학교와 매일성경 큐티와 성경훈련학교 등을 통해 성도들이 변하고 성도들이 헌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상록수교회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호기심 많은 꼬마에서 신실한 목회자로 거듭남

9살의 나이에 매 주일마다 친구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보며 거기엔 뭐가 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교회의 문을 두드린 이종성 목사는 당시 답십리교회에서 사역했던 위윤재 전도사(현 성암교회 목사)와 정영길 전도사(현 원로목사)의 성경공부에 영향을 받고 당시 담임목사인 정태진 목사(뉴욕 거주)의 설교로 구원의 확신을 얻고 목회자의 사명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당시 교회에서 중등부와 고등부 성경공부를 했던 이 목사는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여 사용하시리라는 응답을 받았다. 불신자의 가정에서 신앙을 가지고 더욱이 목회자로의 서원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기질 자체가 뭔가 하고 싶고 알기를 원하면 반드시 그것을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성경공부도 시작을 했으니 꼭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창조의 이야기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님의 이야기, 바울의 전도 등등 학교 공부보다 더 역동적인 이야기로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제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제 꿈은 목사가 됐습니다.”


이종성 목사가 당시 은혜를 받으며 서원했던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설교를 잘 하는 목사였다. 그 일을 위해 신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직장생활을 하며 학비를 준비하고 1984년에 직장에서 나와 1985년 교회에서 교제했던 양진숙 자매와 결혼을 한 뒤, 바로 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그래도 꿈 많고 행복했던 순간 늦깎이 신학생이었지만 마음과 열정만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더욱이 신혼생활을 대학생활(양진숙 사모는 86년에 교회음악과 오르간 입학)로 대체하며 단 한 학기도 쉬지 않고 학업에 전념했다. 그의 집에는 매일 신학생 동기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부흥회(?) 장소였다.


친구들의 수다와 성경공부, 신학 논쟁들이 끊이지 않았다. 타과 학생들도 그의 집에 찾아와 성경을 배우고(성서고사 준비),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의견들을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자금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경제적으론 어려웠던 학창시절이었지만 남부럽지 않는 인맥과 경험들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두 자녀(딸 인애, 아들 인수)를 낳았다. 그 시절에 대해 이종성 목사는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나눌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의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신학과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금껏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교회 개척에 대한 사명과 함께 이런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상록수란 이름이 좋아 개척한 상록수교회

1989년 답십리교회에서 전도사 사역하고 있는 이종성 목사는 당시 담임목사였던 김인봉 목사가 이제는 교회를 개척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지엄한(?)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가진 것이라곤 몸뿐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해 그해 여름 교회를 사임하고 교회 개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개척지를 알아보며 다니던 가운데 안산을 방문하게 됐다. 전철역 상록수역에서 내릴 때 뭔가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이끌림을 받았던 이종성 목사는 곧장 인근에 가나안부동산을 찾게 됐다. 당시 안산을 산업단지로 조성되는 와중이라 상업지역과 주거지역들이 조성되며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는 시기였다.


부동산 업자의 소개로 상록수역 인근 상가 지하에 개척예배만 드린 이후 어떤 활동도 없는 지하 상가교회를 만나게 되면서 상록수교회의 창립이 시작됐다. 198911월 교회를 계약하고 199013일 첫 예배를 드리고 그해 325일 교회창립예배를 드리며 자신의 소망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교회의 첫 발을 내디뎠다. 교회를 개척하기도 전 12월 겨울에 이종성 목사는 홀로 안산으로 내려와 먼저 전도를 시작했고 이에 세 가정이 등록해 개척예배를 함께 했다.


지금도 그 가정들이 교회의 중직으로 그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출석하며 상록수교회의 든든한 일꾼들로 성장했다. 교회 개척 초기 목사 부부가 전도대를 운영하고 직접 노방전도를 나갔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에 구원을 받으리라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새 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1년이 지난 창립 1주년 감사예배에는 60여 명이 성도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며 상록수교회를 든든한 반석위에 세울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종성 목사 내외는 지금도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데에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현재 상록수교회는 청년과 장년층이 180여명, 유치부와 초등부, 중고등부 등 주일학교가 120여명 등 300여명이 출석하고 있다. 지역 특성상 유동인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교회 성도는 교인이라기보다는 영적 가족 입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교인이 지금도 약 2/3이상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그 교회가 상록수교회이다. 남다른 비결을 찾는 중에 꾸준한 구역 모임과 성경학교 그리고 장례식 이야기를 통해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교회에서 초상이 나면 먼저 상주의 의견을 물어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다. 교회 전 성도들이 상주가 되어 3일 동안 손님들을 접대하고 예배를 드리고 상주를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어 준다. 입관과 발인도 교회에서 직접 진행한다. 장의사를 대동해야 하지만 그 외의 모든 장례 절차는 교회가 주관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 백성으로 가는 마지막 발걸음을 함께 교인 전체가 함께 하고 있다. 부고 소식을 들으면 이종성 목사는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3일 동안 교회에 머물며 장례를 집례하고 유족들과 함께 지낸다. 이러한 일은 어찌보면 상록수교회가 가지고 있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종성 목사는 성도들을 가족이라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즉 가족이라면 스스럼없이 대하고 모든 것을 오픈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 교회의 중요한 사안도 자신 스스로 위임받지 않는 이상 제직자 또는 전체 성도들에게 있으며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목회의 열정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 모두의 의견을 듣고 제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 일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뜻임을 우리는 누누이 경험했습니다. 어떨 때는 중대한 일을 발표하기 직전에 한 기도를 통해 응답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상록수교회를 어떻게 만들고 계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매일 매일 경험합니다.”


요즘 그는 2%설교학교를 섬기며 설교자로서 제대로 된 설교가 한국교회를 세울 수 있는 희망과 사명을 가지고 헌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렵다고만 여긴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사는 목회자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설교이기에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이를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공부 그리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날의 교회의 부흥은 설교적 부흥 외에는 다른 것을 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고 성경을 의지하고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2%설교학교의 사명입니다.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지만 들리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설교가 아닌 성도의 눈물을 닦아 주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인한 들리는 설교로 선포하며 듣는 이들이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밝힌 이종성 목사는 가식과 외식적인 삶보다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의 종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끝으로 올 해 부활절이 어떤 부활절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제가 전할 메시지는 매일의 삶이 부활하고 삶의 현장이 부활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절은 상록수교회 창립 26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전 성도에게 각자 꽃 한 송이를 준비해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송이 꽃처럼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삶을 바라는 의미 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종성 목사와의 은은하고 감동적인 대담은 교계와 교단에 기분 좋은 희망을 엿볼 수 있게한다. 자신보다는 교회와 성도를, 명예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의 목회 여정이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으로 열매 맺을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 대담 정리·사진=최치영 부국장, 이송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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