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은 삼일절 94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삼일절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삼일운동의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었고 한국교회는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거의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이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가혹한 박해를 가장 많이 받은 곳이 한국교회였다. 그래서 삼일독립운동을 가리켜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이래 한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통치하에 놓여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각지에 의병을 일으켜 널리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일체의 결사와 언론활동을 금지하기도 했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을 실시해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했을 뿐만 아니라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했으며,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했던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특히 무력투쟁으로 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선두에 섰던 것이다. 한편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 화전민, 등으로 전락했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제창했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됐다. 이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자극제가 됐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게 되자 일본인들의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했다.
해외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해왔으나 1917년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와 뉴욕의 세계약소민족회의 등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자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여기에 한국교회 또한 삼일운동에 적극 앞장선 것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교회들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교회의 특성이 애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교회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삼일운동에 적극 앞장선 것은 겨레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민족이 더 이상 외세의 지배로 고통 받는 삶을 살게 할 수 없다는 애족심이 삼일운동의 바탕이 됐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라를 사랑하다고 하면서도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삼일운동은 폭력을 동원하는 무장봉기가 아니라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비폭력 평화주의로 전개됐는데 이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성경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마다 애국의 방법이 다를 수 있다.
이슬람교 과격단체는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테러를 정당화하며 이것을 애국이라고 주장한다. 고문 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던 이근안 씨는 자신의 고문을 애국이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된 것이나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경제와 산업이 크게 발전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령활동은 나라를 흥하게 하는 애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애국하는 것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