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인류의 끊임없는 갈망이며 논쟁이다. 정의(正義, justice)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기가 쉽지 않음과 시대와 지역과 그리고 대상이 달라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범죄 이후 인간의 속성이 정의를 스스로 주장하거나 정의하기에는 그 정당성이 부족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정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마이클 샌델도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텔로스’, 즉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 정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등을 언급 한 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그 동안 있어왔던 벤담, 칸트, 롤스 등 여러 정의론에 자신의 견해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책의 끝을 장식했다. 결국 정의를 독자의 몫으로 돌린 것이다. 이만큼 정의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끝없는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한 때, 법치가 사회의 정의인 것처럼 각인되어진 적이 있었다. 정작 그 정의를 외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했음에도 국민에게 법치적 정의를 외치며 강요했다. 물론 법치가 이 사회를 정의롭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삼권분립이 분명한 민주제도의 국가이면서도 우리의 정치사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사법부를 채워 정권의 시녀를 삼아 사실상 법치를 통한 사회 정의는 이상일 뿐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가 불편하게 경험하고 있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도 법치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마치 남북 간의 평화가 현 정부나 우리 사회의 정의처럼 통하고 있는가하면, 경제 정의라는 이름으로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하며 기업과 정부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 논리의 배경에는 모순과 함정을 교묘히 감춘 왜곡된 평등이라는 가치가 숨어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평등의 함정과 모순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하지만 오늘의 일부가 주장하는 평등은 객관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이념적이며 대상도 제한적이다. 사실상 세상은 모두의 평등은 추구할 수 있으나 불가능하다. 그런가하면 ‘사람이 먼저다’라는 누군가의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처럼 ‘사람’이 정의인양 말한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사람이 먼저다’라는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에도 깊은 함정내지 음모가 숨어 있다.
사람은 어떤 이유로도 존중돼져야 하는 귀한 존재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대하거나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 우선주의를 강조하는 사이 교묘하게 신, 즉 하나님이 사람들의 가슴과 삶에서 소리 없이 제거되거나 잊혀지고 있다. 이러한 사조 또는 풍조는 에덴에서 뱀의 방문으로 시작됐다.
그래서 사람이 먼저인 정의는 하나님 없는 인생과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주장은 그런 의미가 아닌 진정으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생물학적 성보다는 사회적 성이 중요하다고 외친다. 이러한 논리 속에는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거부하고 대적하려는 대신적 범죄가 도사리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뒤틀려진 정의들이 사회와 대중 속을 활보하는 사이 사람들과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19세기 러시아에서 발생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연구되어 발단된 개념인 포퓰리즘(populism), 즉 대중주의(大衆主義)도 현재 이 땅에서는 또 하나의 정치적 정의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다수결이나 다름없는 대중의 지지, 여론에 근거해서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것은 스스로 법치를 부인하는 우를 범하게 한다.
이렇듯이 지금 이 땅에서의 정의라는 것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다양성 시대에서 다양한 정의론이 뭐 그리 문제이냐 하지만 이는 우리의 삶과 시대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하며 목적 없는 본질의 상실이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또한 이 사회의 혼란은 더 가중될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 강한 개인주의를 형성하며 이기와 탐욕의 괴물이 될 것이다. 이렇듯이 따를 가치가 없을 때 모든 것은 심판을 불러온 노아 홍수 이전 시대 사람들처럼 철저히 자기중심적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기를 대적하거나 자기를 괴롭히는 대상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윤리가 형성되면 그 사회와 그 땅의 사람들은 파괴된 인격의 파편을 맞으며 멸망의 길목에 서게 된다. 세상의 그 어떤 사상, 지식, 과학, 정치, 법, 문화도 진정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새롭게 하며 변화시킬 수 없다. 진정한 가치에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죄성으로 인해 참된 사람다움을 이루며 그 본질적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안은 오직 진리(眞理)다. 진리의 특징은 불변이며 절대적이다. 사람에 의한 세상의 모든 것들로 어떤 정의를 내린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면 변하거나 사라진다. 하지만 돌에 깊이 새겨져 빛을 발하는 진리는 한 점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 본연의 모습을 항상 갖추고 그 영롱한 빛을 발한다. 진리는 예수님이시다. 그의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진리에서 너무도 멀어져 가고 있다.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그 진리로 세상을 이뤄야 하는 교회들과 성도들은 점점 진리적이지 않은 삶으로 향하고 있다.
끊임없이 뉴스를 제공하는 모 교회를 비롯한 다수의 교회들과 성 스캔들로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목회자들의 탈선과 삶 속에서 적당히 세상을 즐기는 성도들은 이미 진리적이지 않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저마다 있는 그 자리에서 온전한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 땅, 이 백성들에게 참된 정의가 물 흐르듯이 흐르게 해야 한다.
사회의 어떤 제도나 지식, 정보, 과학, 문화, 예술, 종교도 이 땅에 참된 정의를 흐르게 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된 자들만이 이 땅에서 오직 진리를 통하여 참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단순하다. 진리대로 살면 된다. 예수이름으로 살면 된다. 예수의 말씀대로 생활하면 된다. 그곳이 가정이든, 일터든, 어떤 관계이든, 또는 교회이든 심지어 교단이든, 개인의 이기적 죄악성을 버리고 오직 주와 그 말씀인 진리대로 실천하며 살면 이 땅과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에서는 다시 참된 정의가 물 같이 흐르게 될 것이다.
진리로 다시 마음의 할례를 행하면서 삶의 할례를 행하자. 진리로 진정한 양심과 삶을 이루면서 진리로 세상을 물들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통해 부여되어진 진리적 삶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사명을 감당하자. 모천을 향해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간절함을 안고 진리로 정의가 숨 쉬는 세상을 위해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위대한 도전을, 여기서, 지금부터 나 자신부터 진리를 통한 정의의 삶을 다시 시작하자.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