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과 교단역사에 있어 올 한 해는 매우 뜻깊은 해다. 삼천리금수강산에 들불처럼 일어났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이고 침례교단으로는 펜윅선교 13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런 만큼 2019년 한해는 우리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합심으로 기도하며 꽤나 민첩한 움직임을 가져왔다.
몇 년 전부터 역사교과서에 교회가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이바지했던 사건들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제헌국회가 기도로 시작했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국가 정신에 교회가 한 축을 담당한 일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 교단은 타 교단에 비해 조용한 상황이다. 물론 올해 영적성장대회를 펜윅선교 130주년 기념대회로 치르기 위한 준비가 이뤄지고 있지만 교단 차원의 적극적인 역사 발굴은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신사참배에 반대해 교단이 해체된 아픈 역사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교단들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흔치 않은 우리만의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교세가 강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도 선교를 위해 헌신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귀감을 살만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은 당시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입장이 대세인 때 당시 내로라하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이 있다.
1939년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서 신사참배 반대의 뜻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고 체포된 한국의 기독교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안이숙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28년 일본의 교토여자전문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후 대구 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선천 보성여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안이숙 선생은 1932년 초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직을 그만두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전념한다.
김동명 목사의 아내이기도 한 안이숙 선생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박관준 장로와 함께 현해탄을 건넌다. 일제가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제정하려던 ‘종교단체법안’의 심의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일본 정계 유력 지도자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 저지를 호소한 안이숙 선생은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서 종교단체법안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리는 거사를 성공시킨 후 체포됐다.
광복 후에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한인교회를 개척했고, 한국에서는 1995년에 대전 새누리침례교회를 개척해 그야말로 교단의 전설적 인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안타깝게도 안이숙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국가로부터 적당한 보상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키고 조선을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인 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일본 국회에까지 쳐들어간 용력을 감안 했을 때 그녀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때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최근 안이숙 선생에 대한 연구가 교단 안팎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 감사하다. 총회(총회장 박종철 목사)는 정부가 안이숙 선생이 항일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받도록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한다. 또 이번 기회에 제2의 안이숙과 같은 우리 교단에 신앙의 등불이 된 인물들을 발굴해 후세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와 믿음의 유산을 잘 물려주는 일들에 더욱 힘써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