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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펜윅의 비즈니스 선교에 관한 평가-4

안희열 교수
한국침신대 선교학

한편 펜윅이 원산 과수원에서 재배한 과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 이호철의 “개화기 서양능금과 과수 재배기술의 수용”(2002년)과 The Korean Repository(1898년)에 게재된 “원산 과일”(Fruit in Wonsan)과 The Korea Review(1901년)에 게재된 “새 달력”(New Calendar)에서 확인이 가능한데 7가지이다: (1) 사과, (2) 앵두, (3) 자두, (4) 배, (5) 구스베리, (6) 건포도, (7) 포도. 특히 원산 사과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것을 조선일보 1925년 3월 31일자에서 기록하고 있다: “원산평과(元山苹果)[원산사과]라 하면 도처(到處)에서 환영(歡迎)를 밧는바 일본(日本)에서도 상당(相當)한 가(價)를 획득(獲得)하는 모양(貌樣)이라는데 일정보이상(一町步以上)의 과수원소유자(果樹園所有者)의 씨명(氏名)은 좌(左)와 여(如)하다더라.” 펜윅이 재배한 원산 사과는 미국종이었지만 원산지와 질적으로 같았고 인기가 높아 잘 팔렸다.


그렇다면 펜윅의 원산 농장과 과수원의 연소득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이에 관해 1902년 5월 29일 자 황성신문에는 “원산항(元山港) 거류(居留)ᄒᆞᄂᆞᆫ 영인(英人) 모씨(某氏)[펜윅]가 … 임금(林檎) 포도(葡萄) 등(等) 과수(果樹)를 다재(多栽)ᄒᆞ얏ᄂᆞᆫ되 매년(每年) 이익(利益)이 이천원(二千圓)에 과(過)ᄒᆞᆫ다더라.” 원산 과수원에서 재배한 사과(임금)와 포도가 작황이 잘되어 과수원의 연간 소득이 2000원 이상일 정도로 비즈니스가 잘 됐다. 특히 원산 사과는 경제성이 좋아 사과 재배 후 블라디보스토크와 나가사키까지 수출이 될 만큼 원산 과수원의 수익률이 높았다. 그래서 펜윅의 제자들은 펜윅을 ‘농학박사’로 불렸고, 1909년 5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펜윅을 ‘농학사’(農學士)로 소개했다.


다음으로 일거리 창출(Job)을 살펴보자. 펜윅이 원산 농장과 과수원을 통해 원산 지역에 얼마나 일거리 창출에 기여했을까? 펜윅은 이것을 밝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 윤병수(尹秉秀)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윤병수는 1929년에 팔정보(八町步)의 원산 땅에서 과수원 재배를 성공시킨 자였다.


그렇다면 8정보인 2만 4평의 과수원에 투입된 인부 숫자는 얼마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개벽 54호 1924년 12월 1일 자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윤병수군(尹秉秀君)은 원산(元山)의 평과대왕(苹果大王)이였다 평과(苹果)로만 연수입(年數入)이 수만원(數萬圓), 사용인부(使用人夫)가 연오천여명(年五天餘名)이란다.” 윤병수가 1924년에도 팔정보의 과수원을 재배했다면 연 5천 명의 인부가 투입됐다. 반면 펜윅의 원산 과수원은 2000평이고, 윤병수의 8분의 1 수준이어서 1년간 최대 625명에게 일거리 창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원산 농장 10만 평을 더하면 원산에 일거리 창출한 숫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개척(Church Planting)을 보자. 펜윅은 10만 평의 농장과 2000평의 과수원을 소유했기에 더 이상 가난뱅이 선교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200개의 교회 운영비와 250명의 사역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이 원산 농장과 과수원을 통해서 채워졌다. 즉 원산 농장과 과수원의 수입은 교회 개척 비용, 순회 전도자들의 생활비 지원, 전도 비용 등으로 사용됐다. 이것이 다른 선교사들과의 차별성이었고 능력이었다. 한편 펜윅은 각 순회 전도자에게 10원을 줬는데 5원은 현금으로 줬고, 남은 5원은 5원에 해당하는 쪽복음(혹은 만민 좋은 기별) 250부를 줬다. 이런 방법으로 돈을 사용한 것은 전도인에게 자립 선교의 정신을 고취해서 교회 사역에 더욱 헌신토록 한 것이었다. 펜윅의 물질관은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사용했다.


둘째로, 참여형 비즈니스 선교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선교사가 직접 외국인 투자 법인을 설립하는 것으로 본인 스스로가 법인 대표를 맡아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펜윅이 원산 농장과 과수원을 “내 소유의 땅”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더욱이 펜윅이 사망하기 약 1년 8개월 전인 1934년 3월 28일에 그의 양아들 안대벽(1894~1987)에게 전달한 유언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펜윅 선교사는 공주, 강경, 칠산에 있는 모든 땅과 일부의 땅과 자신의 보유 재산(원산 농장과 과수원, 원산 총부)을 안대벽 목사(Mr. David Ahn)가 관리, 감독할 수 있도록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이것을 구매자들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증인 입회하에 1934년 3월 28일에 서명했다.”


개화기 시절 대다수 내한 선교사는 교단 후원금으로 교회, 학교, 병원을 짓는 데 돈을 사용했지만, 펜윅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립 선교의 정신으로 일했고, 참여형 비즈니스 선교를 성공시킨 최초의 선교사였다.


셋째로, 비즈니스 선교가 전통적 선교의 좋은 파트너임을 입증했다. 전통적 선교란 선교의 목적이 영혼 구령과 교회 개척에만 있는 것을 말한다. 펜윅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펜윅 = 교회개척 전문가’로만 이해하고 있다. 아마도 펜윅이 근본주의 신앙에 입각해서 오지 지역인 북한, 만주, 시베리아, 울릉도, 그리고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교회 개척에 힘쓴 자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펜윅은 원산에 ‘①교회-②농장-③과수원’이라는 대단위 원산 선교기지를 세워 전통적 선교에 비즈니스 선교가 좋은 파트너임을 입증했다. 마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성공한 비즈니스 선교사(행 18:2~3)로서 자신의 수익을 고린도, 에베소, 로마에서 교회 개척 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펜윅 역시 그랬다. 이런 펜윅의 비즈니스 선교는 코로나 이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한국교회에 좋은 길잡이를 제시해 줄 것이다.

 

2. 펜윅의 비즈니스 선교의 경쟁력
펜윅이 원산 농장과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비즈니스 선교를 감당할 때 어떤 경쟁력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비즈니스 경쟁력이 있어야 소득이 생기고, 그 소득이 교회 개척까지 흘려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즈니스 선교에 있어서 펜윅과 같은 목사 선교사는 평신도 선교사에 비해 경쟁력을 갖기가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비즈니스 경쟁 상대가 대다수 일반 평신도이기 때문이다. 돈과 관련되어 있다 보니 목사 선교사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펜윅은 그 벽을 뛰어넘었다. 무엇보다 두 가지가 그의 강력한 경쟁력이었다.


첫째로, 비즈니스 선교의 전문성이 탁월했다. 펜윅의 비즈니스 선교의 전문성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선교사 파송 전에 보여준 전문성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펜윅이 18세 때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프라이즈 시범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원예, 농업, 목축, 과일 재배 등 다양한 기술을 배우게 된 것은 훗날 원산 농장과 과수원을 경영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다음은 선교사 파송 이후에 보여준 전문성이다. 펜윅이 비즈니스 선교에 특화된 사람이라는 것은 원산을 총부(摠部)로 선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펜윅이 1891년 가을 원산으로 이주해서 선교를 시작할 때 이곳의 인구는 약 1만 5천 명이었고, 농장과 과수원을 운영하기에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지녔다. 특히 한반도 북부지방의 경우, 조선 후기부터 과일의 ‘BIG 4’라 불리던 ‘사과-배-복숭아-포도’의 주산지로 선정되어 집중 재배했는데, 원산 과수원의 경우 ‘사과-배-포도’가 인기를 끌었고, 이 가운데 원산 사과는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펜윅이 남들보다 비즈니스 선교에 경쟁력을 갖춘 것에 대해 1905년에 일본인 농학자 온다(恩田鐵彌)가 한국에서 과수 및 채소 재배에 관한 조사를 마친 후 펜윅의 원산 농장과 과수원에 대해 호평을 내놓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주로 원산 및 함흥지역의 캐나다인 선교사들(펜우빅크[펜윅], 하아지)이 가장 훌륭한 경영 성적을 거두었음을 확인했다.” 온다의 언급은 펜윅의 과수원 경영 능력이 탁월했음을 입증한다.


이것은 바로 펜윅이 사과를 재배할 때 ‘①종류-②번식-③해충방제-④시비-⑤수확-⑥가공-⑦저장’에 이르는 과일의 생산기술을 발전․성공시키는데 전문가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펜윅을 서양식 방법으로 근대적 과수원을 조성한 최초의 인물로 보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펜윅은 농업, 원예, 과일 재배에 관한 지식의 전문성을 전문 잡지에 기고함으로써 개화기 시절 한국의 농사법을 근대화 및 전문화하도록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펜윅은 1898년에 “한국의 농사법”(Korean Farming)이란 글을 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하면서 이랑경작법, 농작물의 윤작법, 곡물의 종류, 다른 곡물의 도입, 그리고 한국 농사 발전을 위한 몇 가지를 제안하면서 그의 농업 전문성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또한 1898년에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부가 “Fruit in Wonsan”이란 글을 통해 원산 농장과 과수원의 재배 현황을 자세히 소개한 것을 보면 펜윅은 비즈니스 선교에 탁월한 경쟁력을 지닌 자였다. 1901년에는 The Korea Review에서 펜윅의 사과재배 보고가 자세히 소개됐는데, 이것은 펜윅이 사과 재배 전문가이자 탁월한 비즈니스 선교사임을 입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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