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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탄력 지수


지난 226,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방 안에 번개탄을 피워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박모(60)씨와 그의 두 딸 A(35), B(32)씨가 숨진 채 발견돼 집주인 임모(73)씨가 신고했다.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봉투에는 현금 70만원과 함께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박씨의 남편이 12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계는 급격히 기울었고 박씨의 두 딸은 카드빚 때문에 신용불량 상태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큰딸은 고혈압과 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동두천에서는 30대 엄마가 네 살짜리 아들을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경기도 광주에서는 40대 가장이 중증 장애를 앓는 열세 살 딸, 네 살배기 아들까지 데리고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했으며, 울산에서는 기초수급자인 지체 장애 어머니가 무직자 아들과 숨진 채 한 달 만에 발견됐다. 이 모두가 일주일 새 벌어진 일들이다.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조선일보의 강경희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 비참했던 시절에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로 위안하며 강한 생존 의지로 버텨온 사회이다. 그 덕에 식민지, 전쟁과 분단, 절대 빈곤 등 한 세기 동안 나라가 겪을 수 있는 악재란 악재는 다 겪고도 번영을 일구어 세계 경제사에 기적을 썼다. 그런 나라에서 어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일이 터질까? 자살이 전염병처럼 확산돼 자살률은 10년 전의 곱절, 20년 전에 비하면 세 곱절로 늘었다.”<2014. 3. 8. 조선일보>


이 기자는 이런 원인을 심리적 회복 탄력성이 약화된 때문이라고 봤다. 심리적 회복 탄력성이란 바닥까지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능력을 말한다.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온 자들이 이 회복지수가 높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까지 됐을까? 이 사건이 터진 후로 저마다 사회복지를 외치고, 이참에 교회도 소외된 이웃에 관심을 갖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과연 복지가 대안이 될까 싶다. 복지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그들에게 살려는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다. 쉽게 말해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곳이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살 희망조차 갖질 못한다. 예전에는 가난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적 빈곤이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 배고픔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인간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박탈감이다.


이것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사회는 갈수록 가진 자의 사회가 되고, 없는 자는 가졌던 자존감마저 망가지는 세상이 됐다. 이런 세상에서 나라가 먹고 살 것을 채워준다고 자살률이 줄어들 수 있을까? 물론, 우선은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복지정책을 펼치는 것이 급선무이겠지만, 그것과 동시에 심리적 회복 탄력성을 높여주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


교회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 이 분야가 아닌가 싶다. 부와 권력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인성이 무너지는 때에 교회는 영성과 인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부와 성장을 위해 달려간다면 어떤 교인이 희생과 헌신의 길을 걸으려 하겠는가?


교회는 세상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려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세상 구원은 돈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으로 가능하다.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래 달려도 터지지 않는 심장이 뛰고 있고, 어떤 짐승이든 쫓을 수 있는 다리와, 어떤 짐승도 찢을 수 있는 이빨과 발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자는 초원을 뛰어다니면서 짐승을 사냥한다. 그래서 피곤하고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자라는 증거가 되기에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런 능력을 부여받았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이제 부정직한 성공과 더러운 이()를 탐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영적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편한 것을 자랑하지 말고 불편한 것을 불행하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불편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한다.


이런 영적 야성이 성도들에게 흘러들어간다면, 그리고 이들이 세상 속에서 조용히 나타내기 시작한다면 세상의 심리적 회복 탄력지수가 높아질 것이다. 교회가 희망이다. 아니, 이제라도 교회가 희망이 돼야 한다.


조범준 목사

영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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