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잊혀 가는 단어가 있다면 이는 “재림”이나 “종말”일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의 관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삶에 대한 고민 때문입니다. 즉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하기에 바쁘다보니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오는 내용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할 겨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逆說的)으로 교회에서 삶에 대해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종말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선 종말에 대해 성경적인 개념을 가져야 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말이라는 것은 흔히 영화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종말은 미래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매여 있는 우린 종말에 대해서 막연하게 두려워 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종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종말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질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이 가르침을 하실 때는 언제 어디에 오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갑자기 닥칠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실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순간부터 이미 종말은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어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으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때에 대한 징조를 말씀하신 것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종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구약에 두 개의 사건을 비유(比喩)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롯의 사건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롯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눅17:26)고 말씀하시면서 그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사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노아의 때를 이야기하면 술주정뱅이가 술주정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합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라는 말이 그런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시집가고 장가들고”란 말은 단순히 타락해 흥청망청하는 삶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롯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29절에는 롯의 때에 하늘에서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다 멸했다고 하는데 그 앞에서 롯의 때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타락”이란 말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타락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흥청망청 하는 것만을 타락했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을 철저히 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도시가 타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은 그것보다 하나님을 떠난 것에 있었습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다름아닌 육신적인 삶에 빠진 나머지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는 비단 그 뿐이겠습니까? 사실 오늘 우리도 사고팔고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과연 노아의 때와 롯의 때처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깊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만 집착해서 안됩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노아의 때, 롯의 때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해결해야 할 문제 때문에 내 생각을 집중해도 결코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 속에서 어떻게 종말을 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 고린도전서 7장29~31절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 쓰지 못할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단축하여 졌으나”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것처럼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처럼,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하라.” 아주 결정적으로 말합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누려야 할 것들을 해야 할 것들, 이뤄야 할 것들, 심지어 기쁘고 즐거운 것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일 성수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주일 성수를 통해 이뤄집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하나님의 방법이 됩니다.
종말론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전부 써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조금 모자란듯한 모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보시기 바랍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시더라도 부끄럼 없이 주님의 나라에 백성처럼 사시길 바랍니다.
박만기 목사/ 서울 풍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