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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와 사랑


똘레랑스(tolerance)”란 타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프랑스어이다.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공간 내에서, 그 구성원 각각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 한다는 의미이다. ‘견디다, 참아내다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말로 자연스런 본능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면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미덕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남의 의견에 동의를 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능력, 역량을 말한다. 정치, 종교, 도덕, 학문, 사상, 양심 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념이다.


,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이나 사상, 상대방의 이념 등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상, 이념도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행동의 자유를 존중 한다는 뜻이다.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해석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서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똘레랑스가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가 있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 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다.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어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은 홍세화의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수였다에서 비롯되었다. 나와 다른 견해,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인정이다. 즉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원래는 허용 오차를 뜻하는 공학용어 인데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어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 특별한 자유라는 뜻이 된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다. , ‘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지되는 것도 아닌 한계자유를 의미한다.


똘레랑스는 이성의 소리로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귀중하면 남의 것들도 똑같이 귀중하며 자신이 존중받기 바란다면 남을 존중하라는 요구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된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 대신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한다. 결국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 내 이념과 신념이 내게 소중한 것이라면 남의 이념이나 신념 또한 그들에겐 똑같이 귀중한 것이다. 즉 내가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남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기주의와도 분명히 구분지어진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받고 인정하려는 의도 속에서 집단적 합의가 수용되어 왔다. 관용을 포함하면서 그 의미와 질적인 다른 차원의 출발을 보이는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으려는 관용의 문화 속에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사랑은 위로부터 내리는 조건 없는 무한한 은혜의 절정이다.


자격 없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친히 대신 죽으심은 전부를 다 쏟으심이다. 한 방울 남김없이 전체를 다 내어주신 완전한 희생의 끝이다. 다른 사람들의 다름을 이해하고 관용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대립과 갈등의 씨앗이 되어 수많은 죄악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래서 다양성을 차별하지 않고 인정하여 최소한을 지키려는 개인적 보호의식이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수많은 역사적 시행착오를 통해 서로를 살게 하는 가치의 한 지점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자기 이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죄인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다.


조건 속에 계산하며 서로가 자기 것을 지키며 최선으로 살기위해 인생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가 똘레랑스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알 전체를 전부 완전히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살리는 온전한 희생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이다.


무가치한 것을 위해 가장 가치 있고 유일한 것을 전부 소모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큰 간격이다. 남을 존중하고 관용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지켜지는 사회와 공동체는 세상이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하여 닮아가자고 소개하며 관심을 갖고 그런 공동체를 부러워한다.


자기 입장과 자기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관용만 해도 공동체는 달라져 간다. 서로 소통의 원할 함을 위해 관용하는 질서를 배우고 반복해서 체득된 습관은 공동체의 격과 수준을 바꾼다. 관용을 통해 무질서의 혼동을 질서의 아름다운 관계로 바꾸어 가야 한다.


하지만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조금의 변화와, 전혀 다른 생명의 능력으로 임하는 은혜는 결과를 전혀 다르게 한다. 사랑을 누리고 체험하며 흘러가게 하는 생명의 강가로 가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노력으로 서로를 지켜주고 인정해 주는 관용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 같다.


사랑의 빚진 자 들이 체험한 사랑을 누리고 흘러가게 하는 현상보다, 인간의 노력으로 고상하게 서로 관용하는 것이 더 빛나 보인다. 사랑에 사로잡힘이 약해지다 보니 인간적 노력으로 관용을 대치하려는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환호하게 한다. 서로 노력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여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서로를 관용으로 대하는 것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의 주체는 다른 것이다.


사랑에 사로잡혀 온전하게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무릎은 꿇어야 한다. 관용으로 대하는 것과 사랑으로 대하는 현상은 비슷해도 그 힘의 근원은 다른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똘레랑스가 흐르면 좋겠다.


하지만 사람의 노력을 넘어 빚진 그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며 사랑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더 부러워하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제자임을 드려내며 서로 작은 위로 자로 사랑하고 살면 더욱 좋겠다.


추복현 목사 / 광주요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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