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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큼


우리 교회는 하나의 동네에 있는 하나의 교회다. 그래서 교인들이나 동네 분들에게 가끔씩 생일초대를 받고는 했다. 대부분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생일상 음식들이 집집마다 대동소이 하다는 점이었다. 종류도 맛도 비슷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 성도들과 대화를 해보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남만큼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 남만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나름대로 원인을 추론해보니 첫째는 체면 때문이고 둘째는 튀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튀지 않으려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는 것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독특하다는 말이 있다. 남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는 의미인데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다수가 독특하다는 우리말보다 유니크(unique)하다는 영어를 즐겨 쓰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잘난 척하느라 영어를 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형성된 독특하다는 말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특한 사람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뭔가 이상한 혹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객관적 연구를 통한 것이 아닌 나의 경험에 근거한 생각이지만.) 이를 통해서도 우리 사회에 남과 다른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왕따 문제는 더 이상 학교 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왕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직간접적 경험상 무엇인가 남과 다른 점이 있는 사람은 왕따 당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의 문제들을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왕따 문제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지역의 초등학교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의 수가 일반 가정의 아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 학교에서도 왕따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다른 경우와는 달리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아닌 일반 가정 아이들이 왕따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달라도 다수가 자신들과 다른 소수를 왕따 시킨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남과 다른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저항하지 말고 고분고분 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남들과 다르게 튀지 말라는 의미도 있다. 속담은 본래 민초들의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남과 다른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 년간 이어온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 단일성, 定住적이고 폐쇄적인 농경문화, 그리고 조선의 오백년간 이어진 폐쇄적 외교 정책과 다른 해석을 이단이라 하며 성리학 일변도의 획일화된 사상적 지배. 게다가 근현대사에 이르러 일제 군국주의의 지배와 군사정권에 의한 군사문화의 팽배.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 깊은 뿌리로 살아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보면 앞서 언급한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와 다름은 낯설고 어색하고 나아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불편하면 힘들고 힘들면 싫어진다. 싫은 것은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 되어야 마음 놓고 싫어할 수 있으므로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취급해버린다. 그리고 틀린 것은 나쁜 것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여기게 되어 거부하고 공격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심리적 기재 하에서 개인의 자유는 종종 억압되며 무엇보다 남과 다른 사람들의 인간 존엄성은 그 가치가 절하되고 무시되고 공격당한다. 더 무서운 것은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쉽게 합리화해버리거나 다수의 등 뒤에 숨어버린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발전에는 반드시 다양성과 창의성이 담보되어 있어야 하는데 다름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한 다양성과 창의성이 발현되기 어렵고 결국 사회적 문화적 발전은 발목을 잡혀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다름을 배격하는 것의 그림자는 같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런데 같음 즉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가 남이가!”하며 집단을 이루면 그것은 하나의 패거리가 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학연, 지연, 혈연이라 부른다. 이러한 현상은 정계, 재계, 학계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며 해를 끼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고도 끈질기게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다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 실체가 확연하게 두드러지지는 않는 문화적 정신적 문제이기 때문에 교정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우리 침례교회가 가진 정신적 자산인 개인주의가 좋은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교회주의의 원천인 개인주의는 내 이웃을 나만큼 존중하는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밑바탕에 깔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통일성과 다양성은 기독교회의 핵심적 정체성이다. 나는 이를 가장 잘 균형 있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개인주의이며 그것이 한국 침례교회가 한국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아주 귀한 선한 영향력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성우 목사 / 반조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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