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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주는 사람

용기란 무엇일까? 어떤 글에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더러운 물로 가득 차 있는 물통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곳에 깨끗한 물을 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물통은 여전히 더러운 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실망하는 기색이 없이 계속해서 물컵으로 깨끗한 물을 부었다. 그렇게 한참을 되풀이한 후 물통을 바라보자 그 물통은 이제 더러운 물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물로 가득 찬 물통이 되어 있었다. 만일 그 사람이 깨끗한 물을 꾸준히 붓지 않고 지겹다고 포기했다면 과연 그 물통에는 어떤 물이 들어 있었을까? 그렇다. 용기란 1초를 더 견디고, 한 번을 더 하는 힘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실패하는 이유는 너무 빨리 절망하기 때문이며, 너무 빨리 단념하기 때문이다.대학시험에서는 1점 차로 합격과 불합격이 판가름나고, 100미터 경주에서는 0.1초 차이로 금메달과 꼴지가 결정된다. 이런 때에 한 번 더 시도하고, 1초를 견디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사실 모두가 포기하는 상황에서 혼자 버틴다는 것은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곳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꿔주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는데, 이 일은 대단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제사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어 시행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성전의 개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 번째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으로,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이라도 하는 것, 이것이 용기다.


사역을 하다보면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예수님 당시의 장사꾼들은 대제사장의 등을 업고 남들보다 빠른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선택하셨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빠른 길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교인들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지키기 위해 쉬운 길을 포기하는 것,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 주고 받으면 편하게 사역할 수 있는데 본질을 포기할 수 없어서 여전히 힘들게 사역하고 있는 것, 이것이 진정 용기다.


예수께서 한 번은 거라사 지방으로 가실 때 귀신 들린 청년 하나를 만났다. 이 귀신이 얼마나 강한지 쇠사슬로도 결박할 수 없는 정도였다. 이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동리 사람들에게도 위협의 대상이었고 불행의 대상이었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는데, 문제는 그 청년에게 있던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선뜻 허락하신다. 그냥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씀하셔도 될 텐데, 왜 귀신의 요청을 들어주셨을까? 귀신의 요청을 들어주시는 바람에 돼지떼 2,000여 마리의 손실을 보았는데 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이 2,000마리의 돼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본질을 위해 재물의 손실을 감수하고, 게다가 사람들의 비난도 감수하는 것, 이것이 용기가 아닐까?


이런 일도 있었다.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였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후퍼와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친구들도 그를 따돌리며 멸시했다. 후퍼가 12살 되던 해 그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다. 후퍼는 지금까지 교회에 가본 적이 없지만, 그 목사가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위해 예배시간에 좀 늦게 가서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잠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 예배가 끝나버려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라고 말하자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후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누구아들인지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목사님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당황하며 빠져나가는 후퍼의 등을 향해 목사님은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주지사가 된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이것이 용기가 아닐까? 바른 길을 위해서 빠른 길을 포기하고, 남들보다 어렵더라도 1초를 더 버티는 것! 소중한 본질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손실도 감수하고 남들의 비난도 감수하면서도 한 번 더 시도하는 것!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축복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용기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용기를 잃어갈 때, 이럴 때는 칼린지브란의 시를 주절주절 읊어보자.

내가 만약 어떤 이의 마음 속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라’(칼린지브란) 오늘도 용기를 내야겠다. 바른 삶을 위해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에게 축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조범준 목사 / 영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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