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한밤중의 노래

조범준 목사 영진교회

1842년에 만들어진 오페라 ‘나부코’는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대작이다.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다음 시즌이 67회나 공연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전작 “하룻만의 임금님”이 하룻만에 실패로 끝난 후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베르디는 이 작품을 통해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 ‘나부코’는 ‘느부갓네살’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그 중 제3막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히브리 노예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곡으로, 베르디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의 시국적 상황과 같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곡이다.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고 잡혀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잇는 대운하 공사와 각종 성벽 공사에 투입되어 고역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고역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이들은 다시 끌려나와 병사들과 감독관들의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일에 노리개감이 되어야만 했다. 이 슬픔과 애환을 노래한 것이 시편 137편이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시 137:1~3, 공동번역)


이에 영감을 받은 베르디는 곡을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곡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베르디에게 새 삶을 주는 부활의 노래가 됐다. 그러므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베르디의 인생의 한밤중에 울려 퍼진 부활의 노래였다. 베르디보다 훨씬 전, 한밤중에 노래를 부른 또 다름 사람이 있었다. 귀신들린 여자 아이를 고쳐주었다가 억울하게 잡혀서 모진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던져졌던 바울과 실라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돈에 독이 오른 주인들에 의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던 한 어린 소녀에게 새 삶을 찾아준 것뿐이다. 그런데 그 주인들은 자신들의 수입원이 사라진 것 때문에 부당하게 고발했고, 전후사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미련한 군중들은 주인들의 말만 듣고 바울과 실라를 법정에 고발했다.


엄중한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집정관들은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바울과 실라를 지하 감옥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당시 빌리보는 거대한 도시였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던 감옥 앞으로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고, 그 감옥 뒤로는 디오니소스 신전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바쿠스’로 불린다. 그리고 감옥 너머의 언덕 위에는 무려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로마제국의 군사 및 상업 도로인 ‘에그나티아’ 가도가 발칸 반도의 동서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빌립보 맞은편의 해발 1,956미터의 팡가이온 산에서는 매년 1천 달란트의 금, 그러니까 매년 34,000킬로그램의 금을 캐내는, 그야말로 노다지 광산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빌립보에 한밤중이 찾아온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개 끌려가듯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옥에 갇혔고, 그리고는 빌립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모두 잠들었다. 그 거대하고 분주한 빌립보의 지하 감방에 갇혀 한밤중을 맞은 바울과 실라는 이미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 밤중에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둔 밤, 적막을 뚫고 흘러나오는 노래는 잊혀진 자들의 노래였으며 고난당하는 자들의 노래였다. 하지만 그 노래는 더 이상 그들이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갇힌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온 한밤중에 우리도 노래를 불러야 한다. 해가 진 후 찾아오는 어둠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내 마음에 어둠이 둥지를 트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간수들에 의해 발에 차꼬가 채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내 마음조차 차꼬가 채워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내 마음에 차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나뿐이다. 내가 거절하는 한 그 누구도 내 마음에 차꼬를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다.


살다보니 힘들 때가 있고 좌절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한 번은 마음조차 흔들리고 있던 때, 음악이 듣고 싶었다. 그리고는 불현 듯 집안 구석에 처박아 둔 30년 된 오디오가 생각이 났다. 육중한 몸집과 무게 때문에 치워놨던 오디오, 그럼에도 너무 가난한 시절 힘겹게 구입한 거라서 선뜻 버리지 못하고 방치한 기기를 꺼내 먼지를 털고 전원을 넣었다. 감미로운 음이 흘러나오지만 무언가 2% 부족한 것 같아 조금 손을 보기로 했다. 기만원을 들여 스피커의 네트워크를 열어 콘덴서를 고체하고 나니 비싼 외제 오디오 부럽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내 마음에 어둠이 내려않지 못하도록, 좌절하지 못하도록 도와준 친구이다.


다시 바울과 실라가 있던 빌립보고 가보자. 여전히 웅장하고 화려하고 풍요가 넘치는 대도시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저 언덕 높은 곳에 세워진 웅장한 디오니소스 신전이 아니다. 수많은 물자를 실은 마차가 달리는 에그나티아 도로도 아니다. 일 년에 34,000Kg의 금을 캐내는 팡가이온 산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차가운 지하 감옥에 있는 바울과 실라다. 왜냐하면 빌립보의 사람들은 그들을 잊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절대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지만 바울과 실라는 깨어 있었고,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도 깨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계셨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 모두가 잠든 그 한밤중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밤중에도 노래해야 한다. 베르디에게 나부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부활의 꽃이 되었듯이,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불렀던 노래가 부활의 합창이 되었듯이, 오늘 우리가 부르는 한밤중의 노래가 우리의 부활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