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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역을 마치면서(1)

1. 신앙 입문 및 소명
저는 1968년 10월 중학교 1학년 때 형님의 인도로 처음 울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중, 3학년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여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는 중에 죄인임을 진심으로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여 1970년 8월 22일 당시 교회 담임이셨던 고 김용근 목사님의 집례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고등학생 시절 중, 고등부 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던 중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명을 받고 목회자로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으나 일반 목회를 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워 고민하고 있을 때 헌신 예배 강사로 오신 인근 부대 군목의 설교를 들으며 깨닫고 군목으로 지원할 것을 결심하고 학교 등하교 할 때마다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등학생 시절 교회 생활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시작하여 저녁 늦게까지 기름종이에 철필 가로반으로 꽁꽁 언 손을 톱밥 난로에 녹이며 교회 주보를 만들었던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매일 등하교 시 집과 학교 중간에 있는 교회에 들러서 목청 높여 기도하였던 일입니다. 아마 이 때 변성기 목소리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후유증(?)으로 지금도 목이 쉰 것 같은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2. 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 담임 목회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어 1975년 3월 3일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정규 2회로 입학하였고, 그 해 5월에 국방부 시행 군종장교 후보생 시험에 응시하여 침신대에서는 합격하기 힘들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하였습니다. 또한 학도 호국단 간부로 활동하며 목회 리더십을 키우는 등 학업뿐만 아니라 향후 군목 사역을 철저히 준비하며 학교생활을 마치고 1979년 2월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군목으로 임관하기 위해 안수 받는 3년의 기간이 필요해서 대학원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대전 침신대에는 교육부 인가 정규 석사학위 과정이 없어 목회 실습 차 거주하던 당시 부산 대신교회 근처에 있던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에 1979년 3월 5일 입학하여 교육학을 공부하던 중, 그 해 11월 25일 현재 세종시 외곽의 대박교회 담임으로 초빙되어 목회를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였습니다.

담임 목회를 시작하면서 동갑인 지금의 아내 이강옥 사모와 결혼하여 외동딸을 두었는데 지금은 그 딸이 결혼하여 외손주 인규와 함께 현재 대광교회 전도사 사모로 활동하고 있으며 1980년 10월 28일 당시 기독교한국침례회 연기지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81년 8월 31일에는 대학원을 졸업하며 교육학 석사 학위와 중등 2급 정교사 자격(국민윤리)을 취득하였습니다. 만 2년 간의 초보 일반 목회를 경험 하고 군목 임관을 위해 1982년 4월 광주광역시에 있는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4개월의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3. 육군 군목 활동
1982년 7월에 육군 군목 중위로 임관하여 약 9년간 보병 제8사단 군종 참모 등 보병 3개 부대와 육군교도소(속칭 남한산성), 수송사령부(국군TMO부대), 국군 논산병원 등 전후방 6개 부대에서 근무하며 1990년 12월 31일 육군 소령으로 전역하기까지 장병들의 신앙 전력과 사기진작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군종 목사로서의 리더십과 체계적인 부대 행정, 그리고 여러 계층의 장병들과의 만남을 통해 폭넓은 인간관계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군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악명 높은 육군교도소 남한산성 군종 실장 근무 시절에는 전방 부대에서 대형 총기 사고를 일으켜 사형이 확정된 두 병사의 신앙을 지도하였는데 마지막 사형 집행장까지 가서 기도하는 등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던 일은 여러 해 군목 사역 중에서 가장 많이 생각 날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가슴 한 편에 늘 뭔가에 눌린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4. 교회진흥원 사역- 간사, 팀장 그리고 원장에 선임되기까지
전역하고 기도하던 중, 친구 목사의 소개로 당시 원장이신 이상대 목사님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몇 차례 여러 대화들을 나누며 서로 좋은 교감을 갖게 되어 1991년 8월 1일부터 교회진흥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육국 교회훈련부 간사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각종 제자훈련 교재(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기도의 삶, 예수님짜리 등)를 발간하고 전국 목회자 및 평신도 지도자 강사로 세미나와 전도 훈련 등을 수 십 차례 인도하며 개 교회 성장과 부흥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본부 영업팀장을 거쳐 1997년 진흥원 부산센터를 개설할 때는 책임자로 발탁되어 4년간 파견근무를 하고 복귀하여 다시 진흥원 전체 영업 업무를 기획, 관리하는 업무를 감당하던 중 2006년 10월 31일 이사회로부터 원장으로 선임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외형적인 과정만 보고 사회에서 회자되는 금수저, 흙수저 용어를 써가며 놀리는 듯 말씀을 하는데 보시다시피 저는 그런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교단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뿐 입니다. 집안에서도 1호 목사로 주변에 큰 교회를 목회하는 분이나 높은 권세를 가지고 돈이 많아 도와주실 분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아래 자녀들은 다 잘 되어 소위 명문대 출신으로 고급 공무원이나 국책 연구기관에서 근무하고 있고 제 사위는 고려대를 거쳐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후 부평에 소재한 대광교회에서 전임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이만큼 이라도 교단 목회자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은혜요 축복이며 금년 94세이신 어머니의 새벽마다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와 제 아내를 비롯한 협동교회 권찬대 목사님과 성도들 그리고 지인들의 중보 기도의 열매라고 믿고 감사할 뿐입니다. 고전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바울의 고백이 부족하지만 진심어린 저의 감사 고백입니다.


저는 평소 목사로서 주어진 곳 어디서든지 기도하며 선한 청지기 같이 헌신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겠다는 각오로 담임 목회와 군목 활동, 그리고 교회진흥원 사역을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하여 왔습니다. 특히 원장에 처음 선임되었을 때, 항상 좋으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교회진흥원을 잘 경영하여 침례교단 뿐만 아니라 초교파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문서선교 기관의 이루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심 없이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목회 현장의 동역자들에게 협력을 구하고 국내외적으로 개발된 새로운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여 제공하므로 일선 목회 활동에 많은 도움을 드려 개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늘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안병창 목사 교회진흥원장, 교육학박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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