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세 암흑기 시대에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훨씬 전인 서기 418년, 아프리카 총 공의회인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00여명의 교회의 감독들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사상의 논쟁에 대하여 교회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진로를 선택했다.
박해의 터널에서 벗어난 당시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원죄로 타락한 불완전한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고 당연시하며, 자신의 의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여 의에 대하여 무책임하고 방종하고 태만했으며, 교회는 그들의 죄에 대한 죄책을 고해성사로 면하게 해줘 사실상 도덕적 해이와 위선을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의 약점과 모순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하게 하셨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요구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학적 소견으로 강력하게 경고하며, ‘죄란 한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저버리고 스스로 불경건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켈레스티우스는 원죄에 대한 당시 교회의 교리와 유아세례(침례)의 필요성을 거부했다.
당시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했는데,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은총에 의한 구원’ 이라는 사상으로,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펠라기우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는데, 결국 교회는 어거스틴의 손을 들어줬다. 이러한 교회의 선택은 당시의 문란한 시대사조와 보편적인 성도들의 심리적 현상을 책망하거나 계몽하기보다 용납하고 묵인하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이 펠라기우스주의는 416년 아프리카 주교들의 2개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고, 418년 5월 1일 카르타고에서 다시 단죄를 받고 결국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418년 교계에서 파문을 당했고, 그 후 이 논쟁은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가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계속 주장해, 430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을 때까지 글로써 그의 신학사상의 논쟁을 벌였고, 이 율리아누스도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 진영의 사람들과 함께 단죄를 받아 파면당하고 말았다.
만약에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당시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 사상을 이분법적으로 양자택일을 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윤리적 책임과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경건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여 가르쳤더라면 온 세상에 편만했던 기독교 교회가 그렇게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부패하며 타락하였을까? 주님의 가르침의 정신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랐던 초대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그 사도들로부터 계승된 신앙으로 살았던 속사도들의 신앙을 교회가 계승했더라면 종교개혁의 역사와 오늘날 교회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다소 억지해석을 하며 막연한 기대감으로 아쉬움에 젖는다.
이러한 어리석고 무책임한 현상은 오늘날 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도 예외 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이며 설교자인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운영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도하고 양육할 때 과연 하나님의 뜻과 영적 진리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존중히 여기며 목회와 삶의 영역에 선택의 기준으로 적용하고 있는가? 무엇에 근거해 선택하고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결정을 하였으며, 그 선택과 결정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수행하고 있으며,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의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예배와 기도와 헌신과 봉사와 그 외의 여러 문제들을 대할 때 무엇에 근거해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하고 결정하는가? 그리고 자신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그 일을 위하여 과연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또한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와 교회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합당한 태도로 반응하고 표현하는가?
사자성어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의 현상은 과거에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그 결과인 것이다. 또한 먼 미래에 지금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그 결과를 내가 보고 겪으며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며,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과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대식 목사 / 신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