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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필요, 용서해야 할 의무

기독교 신앙에서 죄인 된 우리에게 ‘용서’ 라는 말 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들리는 말이 있을까? 이 ‘용서’라는 말을 ‘죄 사함’이라는 말로 변환시키면 ‘칭의’와 ‘구원’과 직결되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되며, 모든 기독론의 근간이 될 정도로 신앙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시대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며, 이 하나님의 인격이 의(義)이신데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활동의 최종적 결과가 용서임을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의 용서의 극치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증명 하셨다.


문학에서 ‘테네시 윌리암스’의 “올페”는 이 ‘용서’의 가치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레이디’는 비운의 여인으로 소개된다.
여주인공 ‘레이디’의 부친은 가난한 이태리인으로서 만돌린이라는 악기와 푸른색 옷을 입힌 원숭이를 데리고 어린 딸 ‘레이디’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 남부에 금주령(禁酒令)이 내리기 전까지 그의 아버지는 술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원숭이의 재롱을 보여주며 술 취한 주객들로부터 동전을 구걸하는 남루한 악사로 삶을 연명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국가에 금주령(禁酒令)이 내리자 술집들이 폐업해 악사로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급기야 밀주(密酒)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돈을 벌어 마을의 아름다운 과수원을 사들이고 나름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됐다.


어느 가을부터 주인공의 부친인 이 늙은 이태리인이 흑인들에게 술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안개처럼 마을에 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은 흑인들을 증오하는 그 지역의 신비단의 젊은이들을 자극했고, 어느 날 밤 레이디의 아버지가 홀로 있는 틈을 타 이 과격한 젊은이들은 과수원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고 레이디의 아버지는 불길 속에서 발버둥 치며 죽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레이디는 부유하고 매력적인 ‘제이브’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을 한 얼마 후에 레이디는 자기 아버지 집에 방화를 한 주범이 자신의 남편 ‘제이브’임을 알게 됐고, 그 후부터 ‘레이디’는 남편을 증오하게 됐으며 남편 제이브는 이런 아내의 마음을 모른 채 부부 사이는 더욱 멀어져서 20년이 지나도 그들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급기야 남편인 ‘제이브’가 불치의 병으로 재수술을 받고 죽음의 그늘이 집안을 어두움으로 뒤덮고 있을 그때 간호원의 독백 한 마디가 죽어가던 ‘제이브’ 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레이디는 분명 임신 중이며 그 아이는 제이브의 아이가 아니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이브’는 ‘레이디’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소리친다. ‘너도 그때 태워 죽였어야 되는 건데, 너의 애비처럼 죽였어야 했는데….’


이 두 주인공의 비극은 용서가 없는 인간관계의 비극적인 종말을 시사한다. 레이디의 비극의 시작은 남편이 아버지의 과수원에 불을 지른 장본인이란 것을 알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용서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20년의 세월을 보낸다. 용서 없는 시간이란, 증오의 철창에 감금되어 복수의 칼을 가는 세월이다.
‘제이브’는 자기가 죽게 한 피해자의 딸과 참회가 없는 20년의 세월을 결혼 생활로 위장하여 지낸다. 결국 참회 없이 ‘레이디’와 이룬 결혼과 가정생활은 죄책감과 두려움과 조바심과 후회와 자기기만이 속으로부터 병들게 하고 육체와 함께 가정과 인생을 서서히 썩게 하고 파괴하여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교단의 107차 정기총회를 끝내고 온 산천을 단풍과 억새로 단장한 금수강산의 가을을 실감하며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며 결실의 현장 한복판에 서 있다. 연극이 끝나고 열광하던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무대에서 허기지고 지친 연기자처럼, 총회가 끝난 후, 우리 교단이 지금까지 해 마다 그랬듯이 보람과 확신으로 교단의 미래를 향한 도전보다는, 선거의 승패와 직접 관계가 없는데도 왠지 모를 허탈과 상실감과 아쉬움을 감추고 애써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상으로 돌아와 목회의 포도원에 들어 왔지만, 교단의 일에 쉬 동화되지 않을 냉소주의의 회오리바람이 북서풍처럼 마음에 몰아치는 것을 느낀다.


또 얼마나 많은 동역자들이 선거로 인한 아쉬움과 좌절감과 적대감과 허탈감의 늪에서 몸부림치며 허우적거릴까? 선거의 당락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면서도 상대편의 모함과 동역자들의 비협조와 배신 때문이라는 심증적 판단으로 자괴감의 감옥에 스스로 포로가 되어 목회의 의욕을 잃고, 동역자와의 소중한 교제를 상실하고, 잃은 영혼들과 내게 맡겨진 신령한 사명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지는 않을지 모르는 일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총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애쓴 모든 분들의 활동에는 비판이나 칭찬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어떤 경우에도 과(過)를 지적하고 추궁하기보다 공(功)을 인정하고 드러내어 존중과 보람을 나눠야 할 것이다.


한 해가 지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은 일들인데, 그리고 한 해가 더 지나면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그 직책도 ‘언제 누가 무슨 일을 했는가?’ 하며 기억하지도 못할 직책들인데! 주님의 피의 공로로 복음의 동역자가 되고, 영원한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하여 한 분이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을 받은 자로, 피 흘린 발자취를 따라 걸어 온 선조들의 신앙을 이어 받은 우리들인데….   
이제 107차 임원이 승선한 “기독교한국침례회호”가 그동안 누적되어 온 산적한 현안들과, 항로를 수정하기에는 너무 오래 멀리 표류해 온 이 교단의 조타(키를 조종하는 기구)수가 되어 출항했다. 시대적으로는 기독교의 쇠퇴 위기, 국가적으로는 남북 간의 전쟁의 위협이, 교단적으로는 산하기관들의 파산과 비정상운영 등 실로 당면한 현실적 폭풍과, 곳곳에 숨어 있는 암초를 피해서 안전하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을은 자연이 영글고 결실하는 계절이다.  이른 봄의 덜 가신 찬바람과 된서리도 온전한 봄의 용서로, 봄날의 그 변덕과 나태함도 한 여름의 뜨거운 용서로, 가뭄과 장마와 태풍의 그 과격한 자연의 폭동도 이 초가을의 맑음의 포용과 푸르름의 높음과 따가움의 깊이로 넉넉히 용서해 이제 아침도 저녁도, 한낮에도 결실을 재촉하며 서두른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데 더욱 주의를 기울여 용서가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과 역사와 동역자들 앞에 참회의 기회를 잃지 말고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내 앞에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넉넉히 용서하자!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먼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 아닌가?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용서해 주어야 할 의무를 가진 자가 아닌가?


조대식 목사 신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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