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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과 잃은 것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명시 황무지의 프롤로그 속에 한 비극적인 노파가 등장한다.
쿠마의 무녀라고만 알려진 이 여자의 전설은 1세기 로마 시대 네로황제의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곤 48장 트리말키오의 향연”에서 인용된 노파이다. 희랍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 쿠마의 이 무녀는 신비한 예언력을 지닌 아주 유명한 여자였다. 이 여자의 예언력은 그녀가 섬기는 아폴로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어느 날 아폴로 신이 자신을 극진히 섬기는 이 여인에게 ‘네가 가장 원하는 소원이 무엇이냐?’ 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쿠마의 무녀는 자신의 손안에 든 먼지만큼의 많은 햇수의 장수를 달라고 간청해 아폴로 신으로부터 장수를 허락 받았다. 그런데 무녀는 장수를 구할 때, 그 장수만큼의 젊음도 함께 달라는 간청을 잊어버렸으므로 나중엔 너무 늙고 메마르다 못해 결국 곤충처럼 쪼그라들어 조롱(鳥籠)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새장 속에 갇혀있는 곤충이 되어버린 이 비참한 노파를 구경하러 온 아이들이 노파에게 물었다.
“무녀야! 네 소원이 무엇이니?” 이 때 이 늙은 노파는 절규하듯 대답했다. “난 죽고 싶을 뿐이야!”   


작가는 편파적인 생각으로 사는 이 시대의 어리석은 인간들의 단점을 풍자적으로 묘사해 신의 은총을 받은 당대의 유명한 무녀가 맞은 비참한 최후를 세상에 깨우침으로 원하는 한 가지를 소유하느라고 겸해야 할 중요한 것을 빠뜨린 인간의 모순과 무지를 간접적으로 고발했다.
이 시대를 보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면 그 때는 ‘배부르게 먹기만 했으면!’ 하던 시절이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시절에는 ‘무엇을 먹을까?’ 하는데 혈안이 되다시피 오직 먹을 것에 대한 욕구가 가장 우선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먹을 것이 해결되고 배고픔을 면한 그 때부터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관심과 소원으로 바뀌어서 조금이라도 남보다 더 차려 입는데 급급하게 됐다.
실제로 세계인들 중에 한국 사람들만큼 입는데 관심이 많은 국민도 없을 것이다. 요즈음도 세계를 다니다보면 가장 옷 잘 입은 사람들은 역시 한국인들이다.


그 패션 감각으로 인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한인들의 대부분의 주종 사업 또한 의류 사업이기도 하다.
이제 오늘날 우리 사회는 건강과 장수가 단연 가장 뜨거운 관심사로 거론된다. 어는 토크쇼든지 이 건강과 장수를 다루지 않는 프로그램이 없는 것 같은 시대이다.
사람이기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해하지만 또 그 다음에 인간의 관심사는 무엇이 될지….


결국 배부르게 되어도, 세계에서 빠지지 않을 만큼 입어도, 그 어느 부분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풍요를 누리는데도 세계에서 자살률 1위, 행복지수 꼴찌라는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교회와 목회 현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지금까지 하던 이야기가 그대로 교회들에, 우리들의 목회현장으로 이어진다.


건강한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선전보다는 허접한 경건의 모양만 갖춘 모순된 교회의 치부들이 적나하게 드러나 자괴감마저 느끼는 이 시대가 아닌가? 불과 4,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얻은 구제품 양복을 수선조차 할 수 없어 몸에 맞지 않은 남의 옷을 그냥 입고 다니며 남루할 정도로 검소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살아도 주의 종이라고 천사처럼 존경하고 우러러 보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주의 종의 기도 한 마디면 믿음으로 만사가 해결 될 것으로 확신하고 소망으로 시련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지내던 시절이 그렇게 멀지 않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오늘날 평생을 목회하고 사역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 주의 종과 교회간의 갈등과 분쟁과 상처와 허탈감,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세상과 주변의 여론들을 생각하면 이것이 단순히 시대적 현상이라고 단정할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그동안 교회는 무엇을 구하며 지냈던가? 주의 종들은 무엇을 가르치며 추구하며 목회를 하였던가? 우리가 평생 주님을 섬기고 그 주님께로부터 받을 보상과 누릴 소망은 과연 무엇인가?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혹시 저 소설 속의 쿠마 무녀처럼 장수는 구하고 젊음을 구하는 것을 잊어버려 조롱속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는가? 두려워진다. 그리고 저 옛날 아모스의 경고와 책망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려진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암6:1)
“너희는 흥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 하는 자로다”(암6:3~6)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암 6:12~13)   


조대식 목사 신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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