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는 방문상담사 돌봄과 성장을 위한 자문 제공이다. 방문상담은 교회의 목양적 방문이나 사회적 방문의 경우 모두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 및 필요한 지원과 돌봄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가치 있는 사역이자 전문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낯선 곳을 찾아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만 아니라 호의적이지 않은 여러 가족 구성원들이나 관리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무거운 이슈들을 다룬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크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소진(burn-out)시키는 힘든 작업이다. 자신들의 상담교육이나 훈련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슈에 직면하거나 상담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경우 상담사로서의 부적절감 등으로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느 전문 상담사도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슈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한계와 전문성에 관한 회의를 경험할 때가 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방문상담사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와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경제적 보상도 충분치 않거나 자원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경험을 오래 지속하기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들의 이름에 대해서 관여와 배려해주심이 있다. 사가랴의 아들 이름을 천사를 통해서 “요한”으로 미리 알려주셨는가 하면(눅 1:13) “고귀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의 이름을 더 크고 위대한 ‘열국의 아버지’ 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기도 했다(창17:5). 또한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름을 불러주신 사례들도 있다. 호렙산 근처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간 모세나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던 사무엘을 밤중에 각각 부르시고는 사명 이나 장차 될 일을 말씀해주셨다(출3:4, 삼상3:10).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불러 주시며, 다윗처럼 존귀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한다(대상17:8).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귀중히 여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지위, 업적, 생애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세까지 명예롭게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며 불러 주어야 한다. 나의 경우엔 대심방시 교인 자녀들의 이름을 갑자기 잊어버려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몇 번 이런 일을 겪은 후엔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퇴장이 더 중요하다. 어떤 주인공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리얼하게 연기하다가 불행하게 퇴장하는가 하면 어떤 주인공은 해피앤딩으로 등장할 때보다 퇴장이 더 아름다운 주인공도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한 자리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전 세계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미국 46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며 엄숙하게 취임식이 진행되는 현장에 전임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를 부정 선거라며 바이든 당선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다가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 난동 사건이 발생하면서 트럼프는 오랜 전통을 깨고 취임 식에 참석하지 않고 백악관을 떠나는 대통령답지 않은 모습을 연출했다. 만 75세의 고령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4년간 재임한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신사답게 승복하고 취임식에서 축하의 악수를 하고 물러났더라면 멋진 모습이었을 텐데 왜 저렇게 비신 사적이고 명예롭지 못한 퇴장의 길을 택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이 자신
토요일 저녁 젊은이부 예배에 들어갔습니 다.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주안에서 살면서 혹시 간증할 사람이 있으면 한번 해보아라”라고 말입니다.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다음 주일에 똑같은 질문을 또 했습니다. 그때도 여전히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간증할 사람이 많아서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다음 주 예배 시간에 이어서 할 정도로 이제는 간증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예배 때마다 간증 시간을 넣으니 아이들이 매주 깨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서 좋고 또 함께 있는 다른 젊은이들이 여러 면에서 다채롭게 은혜를 받게 되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감동스러운 간증은 대 예배 시간에 모든 성도와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그 후, 저는 전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교육하게 됐습니다. 제가 “신앙은?” 하면 교인들은 “삶이다”라고 고백하게 했고, 제가 “기도는?” 하면 교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는?” 하면 “교회〉 가정〉 직장”이라고 하며, “인격적인 우선순위는?” 하면 “하나님〉 가족〉 이웃”이 라고 합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미식가들의 바이블, ‘미슐랭 가이드’를 아시나요? 음식 맛, 서비스, 분위기, 가격 등을 기준으로 레스토랑의 등급을 매기는 가이드이다. 가장 낮은 별 1개부터 별 3개까지의 등급을 매기게 되는데 별 3 개를 받은 레스토랑의 요리사는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고 한다. 매년 별의 등급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별을 얻는 것도 힘들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요리의 나라 프랑스에 조차 단지 20여개의 3스타 레스토랑만 있다고 하니 정말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정말 최고의 맛집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점심 코스가 1인 10만원 수준이고 저녁 코스는 2인에 50만원에서 100만원에 이르는 메뉴가 많다. 그러니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되는 것은 요리사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동시에 차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선발해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가 아주 재미있다. 이 정도 권위라면 뉴욕의 대단한 요리사 그룹이나, 세계 최고의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꼬동 블루 정도에서 관장해야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미슐랭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는 타이어 회사다. 우리가 잘
‘우리는 우리의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허리춤에 빗자루를 매달고 다녀야 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실 수도 없습니다. 사원에 들어가서 신께 기도드릴 수도 없습니다. 신성한 그곳에 그림자도 드리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천하게 태어난 것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 들은 우리와 닿는 것만으로도 오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불가촉천민 달리트입니다’ 이것은 나렌드라 자다브가 저술한 ‘신도 버린 사람들’이란 책 표지에 실린 불가촉천민에 관한 글이다. 힌두교에 의해서 생겨난 인도의 신분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사, 수드라 등의 4계급인데 이카스트 체제에 속하지 않는 가장 하층의 사람들이 불가촉천민들이다. 1955년 법이 제정되어 그들을 종교적, 직업적,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인도 총인구의 약 15%에 속해있는 국민들은 지금도 차별대우를 받으며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불가촉천민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키스탄 남부의 ‘누더기를 입은 땅’이란 뜻의 쫄리스탄 사막에도 거주하고 있는데 바로 마르와리족이다. 이들의 숫자는 약 2만 명이나 그 이상일 수 있는데 힌두교도들로서 역시 천대받으
코로나를 바라보는 2가지 관점이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세계보건기구 WHO와 선진국들의 싱크탱크 및 글로벌기업 CEO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코로나19 이전의 삶으로 쉽게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과학을 믿으니까요!’라는 말은 지난 12월 14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받은 여성 간호사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매일 코로나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야 하는 뉴욕 병원 간호사로서 제법 두려울 법도 한데,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강력한 신념의 근거가 과학이었다. 과학과 의술을 믿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과학을 믿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전진한다는 매우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이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은 최소한 신앙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신앙이나 믿음보다는 과학이나 정보가 더 중요한 듯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이 많이 죽을수록 신앙이 성장한 것이
필요하면 자신이 교회에 찾아가겠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거나 방문하는 것은 부담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다고 보아 기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인들은 저마다 내면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힘든 삶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의미 상실, 그로 인한 불안, 우울과 자살충동을 경험하며, 사회에서 단절되는 개인들이 늘어간다. 스스로 자기문제를 포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된 개인들과 가정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기관들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돌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찾아가는 방문사업들을 확장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방문사역은 그 기능이 약화 내지는 외면되고 있는 가운데, 현대인의 각종 문제현실과 어려운 상황 들은 이웃의 관심과 방문 등을 통한 지원과 도움이 더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목회신학자 브리스터(C. W. Brister)는 빠른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는 교회 사역의 위협 요인들을 언급하며 ‘행위와 성찰’(action and reflection)을 강조한 바 있다. 교회의 전통적 유산이 상실 되어가는 위기를 언급하며, ‘일상의 사건과 갈등, 믿음과 영성의 문제들’에 대한 점검과 갱신의 필요성을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순간 입에서 나온 첫소리가 “나의 주님이시요”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보는 순간 “나의 주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의 첫 고백이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실질적으 로는 너무나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도마의 고백처럼 우리도 진정한 믿음의 바탕에서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 되어진 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유와 쉼과 평안”의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면상 짧지만, 최근에 있었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두 달 전부터 우리 집 마당에 산란계 암 닭 열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첫날부터 이 녀석들은 달걀을 낳기 시작했는데, 저희 부부는 닭장 안에 갓 낳은 달걀을 난생처음 보는 순간 신기하고도 놀라워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웃들도 우리 집에서 닭을 키우며 달걀을 생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엄마는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이 썼다는 “아빠는 왜?”라는 시다. 아빠라는 존재가 초등학생 아이에게 냉장고보다,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인 듯한 모습에 글을 읽으며 남자로, 아빠로서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이것이 어느 한 아이 만이겠는가? 한국에서 아빠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요사이 더 많이 접하는 연애인 사망뉴스, 가족사망 뉴스가 사람의 가치나 존엄을 망가지게 한다. 어느 연구에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외롭다’, ‘괴롭다’거나 ‘슬프다’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또 ‘나’라는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를 적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쓴 글에서처럼 자신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이라서 기보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믿음에서조차 “우리 가족”,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민족” 등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은 “내”라는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