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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의미

신약원어 산책-8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자칭 사도로 그의 사도직을 조롱했다. 적대자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던 바울은 당대에 거짓 사도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였다. 바울이 제시한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를 구분하는 대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인가,’ ‘아닌가이다. 바울은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파송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강조한다(1:1, 11~12).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복음의 계시와 이방인 선교에 소명을 받고 파송 받았다면,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위임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구분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신약이 기록되던 원시 기독교 시대에 12사도와 바울 사도 외에도 다른 사도들이 있었거나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희사한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사도라는 명칭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관해 물음에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로 번역한 아포스토로스는 아포(~로 부터)와 동사 스텔로(내가 보낸다)가 결합해 파생한 “~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명사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 의하면 아포스토로스는 새로운 곳을 탐사하기 위해 항해하는 배를 지칭하거나 외국에 근무하기 위해 떠나는 함대를 지칭했다. 구약에 단 한 번 사용된 사도란 용어는 히브리어 분사 사엘루하(콸 수동태 분사 남성 단수)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고 보냄을 받은 말씀을 전달하는 자(messenger)이다(왕상 14:6). 70인역(LXX) (사엘루하)아포스토로스(사도)로 번역했다.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위한 세금을 거둬들이는 임무를 맡고 외국 지역에 파송된 사람이나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유대 부족장들의 모임과 같은 종교회의의 회원들을 지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약에서 사용된 아포스토로스는 메시지의 전달자인 대사(천사)와 다르며, 마떼테스(제자)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용어이다. 사도는 70명의 제자와 명확하게 구분되며 열두 제자로 부르는 것보다 더 독특한 직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희귀한 용어이다. 마태복음은 전도 여행에 파송하는 열두 제자의 이름을 거론할 때 사도란 명칭을 단 한 번 사용한다(10:2). 마가복음 역시 단 한 번 사도란 용어를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열두 제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누가만 사도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일반 제자들과 구분한 열두 제자란 의미로 사용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란 명칭을 열두 사도와 바울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나바에게도 같은 명칭을 사용한다(13;4; 14:3, 4, 5, 14, 26). 안디옥교회가 소아시아에 파송한 선교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라는 직함이 부여됐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로부터 특별하게 복음 선포를 위해 선택한 열두 사도 외에 바울을 이방인 선교를 대표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하게 되었다(2:8). 열정적인 바울의 복음 사역은 그의 사도권의 표식이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 11:5). 바울 자신은 결코 열두 사도들과 자신의 사도적 명칭을 동일시하지 않았지만 사도적 권위에 대해 동등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열두 사도가 유대인의 사도라면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사도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일부가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에 신학적 논리로 대답하지 않고 목회적 대답으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로부터 전도를 받고 복음을 받아드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 9:2).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신적 권위에 근거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복음 전도의 열정과 평상시의 목회적 삶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주어지고 인정된 권위에 근거하여 사도권을 회복해 주길 호소했다.

 

바울 서신에 의하면 적대자들 앞에서 바울은 사도권에 목숨을 건 사람 같다. 왜 바울은 그토록 자신의 사도권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그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과 자신의 사도권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권이 무너져도 복음이 견고하게 설 수 있었다면, 바울은 아마도 사도권마저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지면 자신이 전했던 이신칭의 은혜의 복음도 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자신의 대적자인 거짓 사도와 타협을 했거나 그들의 잘못을 묵인해 주었더라면, 루터가 이신칭의 신학을 통한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무조건적 은혜를 강조하는 신학이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의식 종교에 도금되어 질식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의 진액과 부활에서 쏟아져 나오는 칭의의 광채를 전하는 것을 고수하기 위해 주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영광스러운 사도권을 주장했다. 바울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탈색시키기 위하여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사도권(목사)을 격하시키려는 사탄의 하수들이 사용하는 책략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 시대에 더욱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사도권을 계승한 교회(목사)들은 복음과 결속된 사도권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천국의 문과 같은 교회의 권위를 지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