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강원도의 한 오지 교회를 방문했더니 날씨가 영하 15도나 되었는데 전도사 사택에는 냉기가 돌았고 방은 얼음장 같이 차가왔다. 전도사가 내게 와서 교회가 어려워서 겨울에도 군불을 지피고 자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나 자신도 하루에 연탄 두 장으로 밥을 짓고 불기운을 유지하며 단 칸 전세방에서 어렵게 살 때였지만 전도사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안 되었다.그런데, 세우 잠을 잔 후에 아침에 마당에 나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있고 뒤뜰이나 다름없는 뒷산에는 삭정이, 솔방울, 죽은 나무 등걸 등 조금만 수고하면 모을 수 있는 땔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손님인 내가, 나무를 해서 불을 지피고 살아라, 어쩌라 할 처지가 아니어서 내 일만 보고 왔지만 일에 대한 전도사의 태도가 걱정 되었다. 그의 마음에는 목회자와 사모는 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각인된 것 같았다. 일하는 사모근래 한국교회는 성장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새로 선 교회들이 자립교회로 성장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교회는 성장하지 못해도 자녀들은 커가며 씀씀이도 달라진다. 목사의 사례비로는 가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 목사는 심방하고 가르치고 기도하는데 전무(專
(3) 상황성(맥락성, contextuality), 상이점, 그리고 다양성‘상황성’ 또는 ‘맥락성’이란 목회상담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문제 서술은 그 내담자의 경험이 해석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며, 그 해석은 그 내담자가 처해있는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른 문제 진단과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스스로 인간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목회상담자는 내담자의 입장과 문제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그 내담자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경청은 한 개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를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하는 목적도 있다.후기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는 모든 인간이 같은 발달과정을 겪는다고 주장하는 인간발달이론과 같은 보편적 이론 또는 진리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인격형성에 관한 포스트모던적 이론들은 인간 개개인의 인격형성이나 발달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각자가 속한 사회적 상황이나 여건/조건들은 인간이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의 측면의 예는 성별이나 인종,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은혜와 심판을 믿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사람들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주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으로 하고 약간의 개종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여호와 공동체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회를 하나님의 백성을 동역자로 삼으시어 성취하셨다. 이스라엘의 근본 책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증거 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말씀에 잘 들어 있다. 그 후 약속의 자녀인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두 아들을 통해 확장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모양을 형성하게 됐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누가는 빈무덤 사건 후에 부활현현 사건들을 길게 또한 자세하게 제시한다. 공관복음서 저자 중 누가만이 부활현현 사건들을 자세하게 제시함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존재성에 관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결정적인 의미가 부활현현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나타남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누가가 제시하는 부활현현 사건은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엠마오 현현(24:13~35); 제자들 앞에서의 현현(24:36~43); 마지막 명령(24:44~49);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24:50~53). 네 사건들이 모두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현현 사건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엠마오 사건을 암시하는 요약적인 진술이 마가복음의 후기 전승(막 16:12~13)에 제시됐다.누가가 제시하는 부활현현 사건들 중에서 가장 길며 자세한 사건인 엠마오 현현 사건에는 사도가 아닌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비록 엠마오 현현 사건에는 사도가 아닌 부차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가는 그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의 이해의 차원을 설명하며 또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학생들 중간고사를 지난 주 치뤘다. 늘 그렇지만 ‘시험’은 여전히 부담인 듯하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한다. 아무리 범위가 정해져 있다 해도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하기야 대체 무슨 문제가 어디서 나올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모조리 다 공부하자니 너무 양이 많고, 그래서 나름의 예상문제까지 만들어 공부해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만 해도 헛다리짚은 게 어디 한두 번이라야지. 그러니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까? 그것도 한두 과목이라면 모를까? 과목이 여럿 겹치는 기간에는 잠도 줄여야 한다. 데이트도 끊어야 한다. 모든 일상을 다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시험은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가장 지치게 만든다. 공부를 많이 하면 몸이 지친다. 적게 하면 마음이 지친다. 이래저래 시험을 앞둔 이들의 피곤함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다. 그래서인가? 시험장에 들어오는 학생들 낯빛이 보통 수업 때와는 다르다. 밤이라도 샌 걸까? 얼굴엔 피곤이 역력하다. 불쌍하고 측은하다. 괜한 것 시킨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든다. 자리에 앉은 그들이 또 책을 펼친다. 한 글자라도 더 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라니 어쩌면 좋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일찍
둘째, 관계적 존재로서의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항상 인간의 삶에 반응하시면서 자신을 계시해 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 역시 그 발달 과정이 일방적인 심리내적인 요소의 과정이라기보다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개인을 둘러싼 여러 관계와 상호작용의 진행과정으로 말미암았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진행과정에서 신앙공동체는 구성원의 사회화, 공동체의 연속성과 안정성,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변화의 자원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즉 공동체는 개인 내면의 의미와 목적과 외부 환경의 구조와 압력 사이를 매개한다. 따라서 개인의 삶과 신앙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의 가치와 규범과 압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된다. 공동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순수하게 개인에 의해서만 구성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 내에서 개인은 공동체 내의 ‘중요한 타자들’(significant others)로부터 신앙의 언어를 학습하면서, 그리고 신앙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모방하고 동일시함으로 신앙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렇다고 하여도 신앙공동체가 직접 구원을 개인에게 줄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
목회란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목회는 교회가 하는 일이고, 목사의 목회는 목사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사람의 일과 교회의 일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따라서 이뤄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고 하셨다. 교회와 구원의 진리를 잘 설명한 에베소서는 구원의 복음을 설명한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알고자 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디어를 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주실 때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조율해야 한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1) 창조와 새 창조.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목적은
회의법에 대한 몇 가지 개인적인 견해를 공론화하는 바이다. 의장(사회자)의 역할회의법을 파악하는 것은 의장의 자격 요건이다. 바꾸어 말하면 회의법을 모르는 이가 의장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의장은 회의를 신속하게 진행하고 2)의견이 엇갈리는 안건의 어느 한 편에 서서는 안 되며 3)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주장과 간섭, 또는 압력에 굴하지 말고 법과 상식에 따라 단호하게 진행해야 한다. 의장은 어떤 경우에나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와 주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고사항과 의결사항기관 이사회의나 연차 총회에서는 보고사항과 의결사항을 구별하지 못하는 예가 많다. 보고는 단순히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 수용여부를 의결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사항을 의결해서 받는다면 의결사항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보고에서는 질의응답을 하고 신 사건에서 검토할 사항만을 채택한다. 이사회의와 단체장정상적인 기관이나 단체의 이사회의는 소속 단체장이 이사장에게 안건을 제시하고 회의 소집을 요청할 때 이사장이 소집하는 것이지, 이사회나 단체장이 피차 상의 없이 임의로 회의를 소집하거나 안건을 채택하지 않는다. 그런 회의는 법적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 회의록 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곧 인간의 사명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 물, 궁창(대기권), 땅, 식물, 주야, 물속 동물, 새, 땅의 짐승 등을 순서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시면서 좋아하셨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니고 식물과 동물들이 진화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게 지음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셨고,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할 일”을 알려주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살아갈 때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말았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것이다. 범죄의 결과는 무서운 것이었다. (1)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깨뜨려버린다. 죄를 범한
필자는 지난 호부터 누가복음에서 제시되는 부활현현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통해 제시되는 누가의 부활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누가 역시 부활현현 사건들에 앞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한다. 그는 마가와 마태와는 또 다른 국면에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하며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것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제시한다. 누가가 빈무덤 사건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간 여인들에게 나타난 두 사람의 전언에 있다. 그 두 사람의 전언은 “그(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24:6a)라는 부활선포에 있다. 그들은 이 선포를 중심으로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 대한 책망(24:5b)과 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수 자신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24:6b~7)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전언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는 한편,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전달되는 구절(24:7)은 주로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동안에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며칠 전, 오산문화예술회관에서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이 음악을 들었다. 지나가는 음악으로야 가끔 흘려들은 적은 있어도 직접 눈앞의 바이올린 소리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물론 그날 연주의 하이라이트는 한 시간 분량의 리스트의 ‘파우스트’였다. 그 역시 곡도 연주도 너무나 장엄하고 멋졌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오히려 내겐 그 짧은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 10분도 안되는 그 연주가 더 진하게 남아 있다. 왜일까? 물론 그것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빗 김(David Kim)의 연주여서이기도 하다. 동양인 최초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악장자리를 15년째 꿰차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 재미교포. 더구나 그 자리는 지난 100년간 유태인들만 차지했단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세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고, 각종 콩쿨을 다 휩쓴 실력자라 해도 그 기득권을 무너뜨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현재 미국의 유수한 연주자들을 다 모아놓은 ‘All-Star Orchestra’의 악장까지 겸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그래서인가?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그의 연주는 뭔가 달랐다. 현란함을 능가하는 충실한 기본기부터 느껴졌다. 멜로디는 정확
(2) 바울과 인권 성서에 나타난 인권사상이 바울을 통해서는 어떻게 실천되었을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인간 죄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2).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존엄성을 상실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인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권리는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바울은 모든 인간의 평등성과 통일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바울은 이 선언을 통해 모든 인간관계의 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 존재로 승화시켰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기독교 목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왜 어떻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서 기독교 목회의 원리가 발견된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 모두를 친히 창조하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 가운데 운행하시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엡 1장). 하나님은 만물의 중심에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어 영광을 받기 원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더불어 교제하시고자 함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된 삶을 살았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는 목회의 몇 가지 원리를 살펴보자. 1)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위해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다. 즉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다스리게 하자”(창 1:26) 하셨다. 즉 사람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만드시어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먼
필자는 사복음서에서 제시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앙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다. 지난 호에는 마태가 전하는 부활현현 사건의 마지막 국면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누가복음에서 제시되는 부활현현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통해 제시되는 누가의 부활신학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누가는 공관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부활현현의 중요성과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저자이다. 누가만이 엠마오 사건을 통해 사도들의 체험 외에 다른 두 제자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는가를 상세하게 전달한다(눅 24:13-35).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복음이 전파된 지 두 세대가 지난 그의 세대의 신자들을 향해 어떻게 그들이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가에 관한 교훈을 길게 전달한다. 누가 역시 부활현현 사건들에 앞서 먼저 빈무덤 사건을 전달한다. 그는 마가와 마태와는 또 다른 국면에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하며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증언한다.누가복음에서 모든 부활현현 사건들은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의 사건들은 부활절 당일에 일어난 것으로 제시되는데, 부활하신 예수의 마지
잘 가셨지요? 아버지? 사랑하는 예수님도, 먼저 가신 할머니 권사님도 잘 만나셨지요? 혹 처자식두고 먼저 가신 아쉬움보다 아버지의 어머니 만나신 기쁨이 더 크신 건 아니신가요? 벌써 그러시면 좀 섭섭합니다. 당신 큰 손주 목회 잘하고 있다고 안부는 전하셨지요? 살아생전 할머니의 기도를 지금도 이 손자가 그리워하더라는 말도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아버지를 위한 천국환영식은 어떠셨나요? 좋으셨나요? 예수님이 잘 준비해 주셨던가요? 이 세상 높은 자리에 올라 자주 상 받으시고, 박수 받으실 때보다 얼마나 더 영광스러우셨나요? 천사들의 특별찬양의 하모니 역시 과연 수준이 대단했겠지요? 아버지를 위해 마련된 천국집은 어떠신가요? 아버지 힘으로 결혼 35년만에 28평 아파트 장만하시고서 그렇게 흡족해하셨던 기분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좋으신가요? 궁금하니 꿈에라도 살짝 보여주십시오. 분명 멋지고, 우아하고, 화려하고, 크고, 편안하고, 비교할 수 없을만큼 격조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떠세요? 말로만 듣고, 꿈만 꾸던 하늘나라를 직접 가보시니…. 생각한만큼 좋으신가요? 아니면 생각 이상으로 좋으신가요? 정말 우리가 충분히 동경하고, 그리며, 소망해도 부족함이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