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침례 사이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써의 성령침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침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침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봤다.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침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침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침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
김한순 목사 금마성산교회 침례교부흥사회 부회장 신학적 배경 토레이의 저서 ‘성령침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의 핵심은 이 책 속에 계속 되풀이 되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서는 이하나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즉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성령 충만하였다” “위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다”“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등 이다. 둘째는 성령침례란 우리가 그것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체험의 문제 라는 것이다. 셋째는 성령침례란 성령의 중생케하는 사역과 별개의 것이요 구별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넷째는 성령침례란 언제나 증거와 봉사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토레이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했지만 그것이 “성령침례”는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 토레이는 그의 예일 대학 동료였으며 그의 목사 안수식 설교자였던 힐스(A. M. Hills)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첫 목회를 서로 밀접하게 도와줬으며 영적 탐구에 있어서도 서로 조력했다. 그러나 1900년경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의 성령침례론의
2.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눈 여겨 볼만한 대표적인 학자는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800여년이 지나고 아퀴나스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진리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다. 이성은 자연의 빛에 의해, 신앙은 은총의 빛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봤다. 그는 계시는 이성을 전제로 하며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계시가 없이도 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 문제점을 남겨 놓게 된다. 이성에 ‘자율성’(autonomy)과 ‘자기 충족 성’(self-sufficiency)을 부여하여 이성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기도를 잘 하지 않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기도도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되어 있어야 야베스처럼 기도의 “능력자”라고 칭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도의 원리는, 기도할 때 기도자의 관점, 시선,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역대기의 저자가 의도를 갖고 족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으며, 유다 족속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유다 족속이 포로 후기 공동체의 중심으로 세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왜 야베스의 어머니가 고통 중에 야베스를 낳았다는 표현을 기록했을까요? 유다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유다 족속의 기록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는 야베스 삶의 기록이 부정적인 표현으로 얼룩지어진 것은 선 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본문은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을 분명하게 풀이까지 해주는데, 야베스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단어에서 왔다라고 밝혀줍니다. 히브리어에서 고통이라는 단어의 자음 위치를 바꾸면 야베스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자음의 순서가 됩니다. 우리말로 정확히 묘사하기는 힘들지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야베스의 기도”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2000년대 초반 애틀랜타의 부르스 윌킨스 목사님의 야베스의 기도-내 삶을 채우는 기적의 원리라는 제목의 책이 세계적으로 천 만 부가 넘게 팔리게 되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나오고,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책을 비판하는 글들 또한 많이 출간되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천들의 기도 모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돼야 하는데, 야베스의 기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했으며,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불어 넣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윌킨스 목사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현상이나, 이것에 반응해 많은 비평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 것들을 돌아볼 때, 야베스의 기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많은 학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하는 본문의 해석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뿐이고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만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상징적 언어 또는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가 “나는 문이다”(요10:9)라고 선언할 때, 영생과 구원의 문이 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선언하실 때문이라는 물체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본질이 변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문의 밑에, 함께, 또는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체험하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선언에도 문은 문으로 남아 있지만 단지 그리스도가 문맥 가운데 말씀하신 내용처럼 예수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매개체를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 작용한다. 동일하게 주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의 기념설에 의하면,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징체의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은 과거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념
V. 침례교 전통의 주의 만찬의 이해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할 수 있는가’란 추상적 논쟁보다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례전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용돼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둔다. 침례교 전통은 주의 만찬을 열린 주의 만찬과 닫힌 주의 만찬으로 구분해 실행한다. 열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만찬에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복음주의 교회의 회원들을 어떤 교리나 교회 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한다. 반면에 닫힌 주의 만찬은 물에 잠기는 침례 의식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게 한다. 어떤 의식 절차보다도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을 믿는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침례교 전통은 오직 침례(세례 또는 영세)를 받은 자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다른 교회 전통과는 달리 열린 주의 만찬에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의 침례 의식을 행한 자들에게만 허용하는 닫힌 주의 만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이번부터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사역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극적인 사역인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소위 ‘축귀’ 사역으로 알려진 ‘귀신축출’ 사역은 지금은 이단으로 인정된 어느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이사역에 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사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여러 차례 귀신들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들에는 대부분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마 4:24; 8:16; 막 1:34; 눅 6:18). 예수님이 그의 열두 제자들을 따로 세우신 목적 중 하나는 귀신축출 사역을 계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막 3:15).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을 계승하며 재현하는 복음을 일꾼들로 훈련하기 위해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귀신축출의 권세를 주셨다(막 6:7; 마 10:1; 눅9:1;10:17).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은 그분이 행하신 첫 번째 공적 사역이었다(막 1:21~28; 참고, 눅 4:33~37).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의 공
인권과 기독교 인권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권은 사회에서 교회가 책임져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단순한 대응이 아닌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인권에 대한 문제들을 성서에 근거해 적절하게 이해하는 작업과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실천 방안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각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인권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행을 바탕으로 인권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 정립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권 실현에 대한 의지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때 개인적 차원에서만 인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간의 협력 등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극화에 대한 반성 양극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 하는 빈부격차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반목 현상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를 겪고 있는데, 이는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화체설은 떡과 피가 직접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적 실체로 바뀜으로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설명했다면,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심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가 공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루터는 삼위일체의 연합(일치)과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의 연합은 유사한 신적 신비로 이해했다. 그가 떡을 분배할 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먹도록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기술한 본문이 지금 여기에 있다. 이것 위에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취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발생하거나 어떻게 그가 떡에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박하거나 측정하는 것 없이 우리가 믿어야만 한다. 우리의 눈으로 그 떡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의 귀로 듣는다. 공재설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의 만찬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플라톤은 눈으로 볼 수 있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실체로 대치됐다면,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부수적인 성질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가?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형되는 실체의 교환이 이뤄진다면, 역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실체는 외부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껍질(accidents)이 떡과 포도주의 껍질로도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가 되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오류를 인정하게 된다. 칼빈은 화체설의 이런 철학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떡과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그 백색을 그 본질과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여전히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화체설을 주장하는 가톨릭교회 역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화체설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만찬에 대한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있다. 아퀴나스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단죄하고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길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점들에 대해 유의하지 않고 그들은…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18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6개 OECD 회원국 중 1위로 하루 평균 37.5명, 연인원 1만 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가족관계의 와해, 고립 감, 열등감, 소외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 노인층, 여성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게 됐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대체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결과로 야기됐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에도 고의적 순교보다는 적극적인 도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아가 알레스 공의회(452년)에서 자살은 ‘사탄적인 죄’로 규정했고 이후 공의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고, 교회 묘지 안장도 금해지는 조치들이 순차적으로 추가됐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와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자살 금지 태도를 보인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있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자살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사회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살의 위험한 현실을 직시하며 윤리적 책임성과 문제의식을 느끼
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체주의자인 데리다(Derrida)는 글을 쓰는 행위를 ‘글쓰기’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또 독자의 사용에 따라서 다른 언어나 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또 다른 단어나 말에 의해서 상치시킴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현재의 독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출현한다. 텍스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의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Derrida에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는 차이와 연기를 결합한 “차연”, 즉 디페랑스의 개념이다. 하지만 해체주의 해석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기는 해도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접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학자 캐빈 밴후저는 해체주의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무위화” 또는 “니힐리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신학자 엔서티 티슬턴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게만 애착을 느끼게 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여 본 연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를 환원시키거나 재고려해야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환
교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예배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 지침으로 대면예배가 어려워지고 행정조치로 인해 예배당이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던 팬데믹이 극에 달했을 때 많은 교회들은 예배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예자연)는 서울시장을 상대로 대면예배 금지 처분 취소 소송을 진행했고 최근 6월 10일 1심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대면예배 금지 처분은 교회가 음식점 등과는 달리 생산 필수시설이 아니라는 점에 근거해 집합을 금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들의 심적 위안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증오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등 안정된 정신 건강을 지원하는 순기능이 있다”며 “장기간 시행된 거리두기 등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우울증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기능이 생산필수 시설에 비해 열등하거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볼 타당한 이유는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 감염 예방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이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비례의 원칙이나 평등원칙에 반해 재량권을 일탈, 남용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그동안 교회 예
오는 7월 16일, 서울광장이 음란과 죄악의 장소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한국교회 내에서 커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리는 동성애축제(퀴어축제)를 조건부로 승인했다.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시민위)는 지난 6월 15일 회의를 통해,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신청한 서울광장 사용 신청 안건을 수정, 가결했다. 시민위는 애초 조직위가 신청한 행사 기간(7월 12∼17일)을 7월 16일 토요일 하루로 줄이고, 신체 과다노출과 청소년보호법상 금지된 유해 음란물 판매·전시를 안 하는 조건으로 광장 사용 신청을 받아들였다. 시민위는 무대 설치 등 행사 준비 시간을 주기 위해 행사 전날인 7월 15일 오후부터 조직위가 광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동성애축제가 처음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것은 2015년부터이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오프라인 집회가 금지된 기간을 제외하고 불허된 적이 없이 매번 시민위를 통해 사용신청이 통과됐다. 지난 2019년 당시 서울시의 다수의 공무원들이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를 반대하며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서 ‘서울광장은 시민의 건전한
말씀과 기도의 축제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 침례교 연합기도회는 지난 6월 3일 세종꿈의교회(안희묵 목사) 집회를 끝으로 12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과 함께한 이번 연합기도회는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대면과 비대면으로 동시에 적극적인 참여로 말씀을 회복하고 기도로 은혜받은 집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연합기도회가 열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코로나19로 인해 제한적인 교회 사역 가운데 나온 돌파구였다. 교회의 모임이 제한을 받고 대면 모임이 사실상 통제되면서 대규모 집회를 치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온 대안이었다. 그리고 이 대안은 지난해 12일 동안의 연속된 집회를 통해 침례교회가 ‘기도하는 교단’ ‘말씀으로 충만한 교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특별히 2022년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주요 지역의 거점교회를 선정하고 인근 지역에 속해 있는 침례교회가 함께 연합으로 참여하는 자리로 마련하자는 취지로 10개 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다. 교단 안팎에서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말씀 증거자로 나서 침례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 구령을 위해 교회 회복을 위해 한
2년 남짓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교회는 심각한 목회 사역의 타격을 입었다.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는 해제되고 일상의 회복이 이뤄지면서 외관상으로는 정상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교회의 완전한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와 기아대책 등이 지앤컴리서치(대표 지용근)에 의뢰해 조사한 목회자와 교인들의 현장 예배 참석에 대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3명만이 현장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지앤컴리서치는 또 목회자 981명과 교인 1500명에게 설문한 결과 28.3%만이 ‘곧바로 현장 예배에 참석했다’고 답했으며 57.8%는 ‘일정 기간 지켜본 후 현장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했다. 지난 5월 첫째주부터 교회는 마스크 미착용자나 발열증상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 모든 인원에 한해 예배당을 개방하고 교회 자체적으로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가운데 교회 사역을 정상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도 안되는 인원만이 현장 예배에 참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온라인 예배에 길들어진 성도들의 주일 예배에 대한 인식이 현장 대면 예배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면 예배 참석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그만큼 역사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뛰어넘어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침례교의 역사는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침례파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 시기였던 16세기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됐다. 침례교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됐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인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침례회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William Carey)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됐다. 한국 침례교의 기원은 1889년 12월 펜윅 선교사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로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