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5월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등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도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여러 행사와 관련 설교들로 성도 모두가 성경적인 가정 안에서 화목함을 누리고 주님의 사랑을 만방에 선포하도록 권면한다.
가정은 전통적 가정과 현대적 가정, 그리고 성경적 가정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 가정은 가장에게 권위가 집중돼 그 안에 엄격한 질서가 존재한다. 때문에 가족 구성원들의 자유가 희생되는 일이 많다.
핵가족으로 대변되는 현대적 가정은 전통적 가정과 반대로 가장에 대한 권위의 부재로 가족 구성원들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허용되는 유형이다. 이는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반면 기존 질서가 상실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지향하는 성경적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인 부모를 존중하며 동시에 부모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권위를 사용해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함으로 따뜻한 질서와 절제된 자유를 동시에 경험하는 유형이다. 그야말로 전통적 가정과 현대적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모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핵가족을 넘어서 1인 가구시대로 흘러가는 양상을 보이면서 소외와 무관심, 개인주의 등의 문제를 보이고 있다. 특히나 1인 가구를 겨냥한 혼밥 문화와 원룸의 대량 생산 등의 1인 가구를 부추기는 상황들이 점차 성경적 가정을 훼방하는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인 가구뿐만 아니라 경제적 여건 때문에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자녀들이 고아아닌 고아와 같은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분명 현대적 가정의 양산으로 나타난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강단에서 목회자들이 느끼는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혼, 부모를 향한 공경,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문제에 대해 설교를 하더라도 1인 가구가 점점 늘고 자녀와 함께 저녁을 먹을 시간조차 없는 가정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성도들의 귀에 목회자의 메시지가 가슴깊이 와 닿을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혼란스러운 이런 현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성경적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사명을 더욱 고취시켜 올바른 사회에 일조해야 한다. 강단에서 가정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지 않는다면 교회 내 가정은 점점 병들어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적 가정관을 설파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한다.
교회는 남녀가 주님의 인도아래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믿음으로 양육하면서 신앙의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그러한 성경적 가정관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 때문에 가정을 이루는 것을 두려워하는 싱글 청년들에게 가정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용기를 선사해야 한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 홀로 생활하는 노년층에게도 소외감을 떨쳐버리도록 관심과 봉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설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성경적 가정의 행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 또한 교회가 고민하고 장려해야 할 부분이다. 아무쪼록 5월 한 달 간 성경적 가정의 의미를 되새기고 급속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벗어나려하는 세상의 풍파에 당당히 맞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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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이 돌아왔다. 참 빛인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다는 사실에 목자들은 물론 동방박사들까지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천군 천사가 함께 찬송을 드린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각 개교회들은 성탄트리를 장식하는 것은 물론 성탄절 칸타타를 연습하며 이 땅의 평화와 사방에 펼쳐질 복음의 은혜를 만끽한다. 교회뿐만 아니라 서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청 광장과 대한민국의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에도 성탄트리가 세워지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분단의 상흔이 씻기지 않은 한반도 문제와 지역, 세대, 남녀 갈등 등 어느 때보다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절실한 2018년의 성탄을 맞이하고 있다. 교회는 빛을 발해야 한다. 복음과 사랑의 빛을 온 세
로티 문 선교사는 미국 남침례교(SBC) 선교의 전설이다. 해마다 남침례교 교회들은 성탄절 헌금으로 로티 문 선교사의 이름을 딴 ‘로티 문 헌금’(Lottie Moon Offering)을 드린다. 로티 문 선교사(1840∼1912)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격변기의 중국에서 헌신적 선교를 했다. 그는 선교지에 나간 여성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최초의 여성 선교사다. 7남매 중 넷째로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로티는 남북전쟁 전에 남부 아가씨에 걸맞은 교육과 귀족들이 누렸던 특혜를 받으며 자랐다. 로티 문이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믿음이 신실하신 어머니는 자녀들을 좋은 신앙인으로 키워냈다. 로티의 오빠 토머스와 언니 오리아나는 훌륭한 의사로, 막내 여동생 에드모나는 미 남침례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독신여성 선교사 2명 중 1명이다. 로티의 사역은 1872년에 중국선교사로 파송된 동생 에드모나 선교사를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 1873년, 로티 문은 중국 북부에 도착해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교사 일보다는 로티는 중국 현지 담당자에게 전도와 교회개척 분야를 희망했으나 그 요청이 거절되자 그는 홀로 핑투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
2018년 달력이 이제 한 장만 남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때다.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교회는 또 상처로 힘들어 하는 자들과 아픔을 겪고 있는 자, 어려움이 해결할 조짐마저 보이지 않는 자를 향해 끊임없는 위로와 격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어려운 자들을 일으켜 세워 세상 권력을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애굽의 압제와 권력에서 해방시키셨고 재산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해서도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된 자들과 병든 자, 소외된 이웃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몸소 실천했다. 그러면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실천하기를 명령하셨다. 그 뜻에 맞게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많은 사랑을 나누며 실천했다.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어려움에 처한 자들, 순교의 순간을 맞이하려고 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냈다. 세상이 풍요롭다지만
매년 찬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주변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는 나눔과 돌봄을 위해 언론매체들은 사회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나는 섬김, 나눔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 어머니의 달비(딴머리) 머리다. 지금은 가난이 내게 위대한 선생이 되었지만 유아시절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서준 과도한 빚보증 때문에 집과 모든 재산, 가재도구들이 집단리에 의해 모두 경매처분 되어 갑자기 가난이라는 것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우리 식구들을 덮쳤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부모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했던 최후의 끈이 “내 어머니의 달비”였다. 까마득한 기억의 어린 날, 친정어머니께서 큰딸 시집보내면서 반닫이 느티나무 농 밑에 고이 넣어 주셨던 대장장이가 정성껏 만든 까만 가위를 새벽기도 드리고 와서 곱게 갈아 옆에 놓고 어머니께서는 그 일을 하실 때는 꼭, 잠에 취한 어린 나를 깨우셔서 앞에 앉히고 둥근 체경(거울)을 손으로 잡게 하고는 비녀를 뽑은 삼단 같고 칠흑 같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앞으로 곱게 넘겨 빗으시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조금씩 여기저기를 잘라내셨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이 보이지 않게
아직도 건국일 하나 제대로 통일하지 못하고 둘로 나눠져 대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길을 잃으며 방황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주변국을 비롯한 세계는 급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터 아닌 전쟁터를 만들며 나라 밖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저지와’(井底之蛙), 즉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물 안에서 ‘좌정관천’(坐井觀天)하고 있다. 좁디좁은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을 보면서 하늘이 이러니저러니 한다. 자기 좁은 세계로 하늘을 보며 하늘을 말하는 개구리가 바다를 알리가 있겠는가? 아니 바다에 대한 생각 자체가 있겠는가? 최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모습이 꼭 우물 안에 앉아 우물만큼의 하늘만 보고 서로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개구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청와대와 정부는 남북문제에 정권을 몰입하지만 남북문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고,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한다는 북핵의 해결도 오리무중이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촉발된 한국 경제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이제 국민 대다수는 서서히 다가오게 될 경제 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들만의 정책을 찬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