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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적 허무와 은혜의 족함

조대식 목사
(신태인교회)

인간이 한 평생 세상을 산다는 삶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그 일생의 삶에서 겪는 희노애락과, 형통과 불통, 행복과 불행의 사연들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의 한 평생에 겪고 누리는 모든 삶이 나에게 남기는 보람과 소망은 무엇인가?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생동안의 삶과 그 삶을 담아내는 동안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의 가치와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나님과 함께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데 대한 가치는 무엇이며, 무엇을 신앙으로 산 삶에 대한 보람으로 여겨야 하는가?  옛날 어릴 때 이발소나 식당, 사람들이 붐비는 버스 대합실, 그리고 웬만한 가정 현관 등에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림을 배경으로 제작된 액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시가 생각난다.
바로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글귀다.


이 유명한 시인의 풀 네임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믿으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지나가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이 유명한 시의 주인공 푸시킨은 러시아에서도 뼈대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시 귀족들이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할 때, 그는 러시아어로 말과 글을 일치시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쓴 작가였다. 그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러시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농노제로 불이익과 고통을 겪고 있는 평민의 편에 서겠노라는 자기 자신의 시국 선언의 의미도 담겼다고 볼 수 있다.


화가 오레스트 키프렌스키가 그린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초상’을 보면, 전해지는 말과 같이 그의 용모가 상당히 품위 있는 명문가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의 외모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용모와는 달랐는데, 그의 피부는 까무잡잡하며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곱슬이었고, 검은 눈동자에 낮은 코, 이런 그의 외모는 러시아 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푸시킨은 자신의 이러한 외모를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 시절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그의 외증조부 아브람 한니발의 특징을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푸시킨 자신이 바로 그의 외증조 할아버지 혈통을 받아 그 특징이 외모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푸시킨의 외증조부 아브람 한니발은 일곱 살 때 에티오피아에서 노예로 끌려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술탄의 시중을 들다 여덟 살 때 러시아로 끌려갔는데, 이 노예소년의 남다른 총명함이 당시 황제였던 표트르 1세의 눈에 띄어 이 흑인 노예 소년에게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의 이름을 성(姓)으로 하사했고, 스물한 살 때 파리로 보내 예술과 과학, 군사 등 고급 교육을 받도록 했다. 학업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한니발은 군 입대해 소장까지 진급해서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한니발 장군의 손녀가 바로 푸시킨의 어머니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끌려온 노예에서 러시아제국의 장군까지’ 됐던 이 외증조부의 후광을 입고 차르와 소수 귀족에 맞서 다수 민중을 대변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던 푸시킨이었으니 이런 자신의 외가 혈통에 큰 자부심을 가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가문의 배경이나 그의 신념, 그리고 서민과 평민을 대변하며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이상과는 달리 세상에 알려진 바, 그의 죽음은 서른여덟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너무나 어이없고 허무하게 생을 마쳤다.


이 사람 푸시킨은 외가의 후광을 입어 ‘나탈리아 곤차로바’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이 여인은 러시아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미모가 빼어나 뭇 남성들의 호감을 샀다. 그 중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망명 온 한 프랑스군 장교 출신 조르주 단테스가 자신의 아내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요즈음 말로 스토킹)구애하자 자존심이 상한 푸시킨이 당시 국가의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신청한 것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투를 먼저 신청한 쪽은 푸시킨이며, 두 신사의 결투에서 먼저 총을 맞은 사람도 푸시킨이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집으로 옮겨져 이틀 후에 숨지고 말았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저택 부근에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 푸시킨을 걱정했는데,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푸시킨의 인기와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평소에 푸시킨이 왕족과 귀족에게 적잖이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이 푸시킨을 아끼고 애도하는 군중이 많아 자칫 푸시킨의 장례식이 민중의 시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당시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의 장례식에 앞서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을 허용하고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을 금할 것,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파견할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히 금할 것” 등의 특별령을 내렸다.


삶의 긍정을 노래하며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이 미래에는 그리움의 추억이 될 것이라고 노래하였던 시인 푸시킨의 생애가 우리에게 비애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푸시킨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얼마 후에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푸시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두려워 영원히 러시아를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의 고상한 삶의 철학과 낙관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남긴 허무와 아쉬움은 그의 시 이면에 남겨진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비관적인 어두운 여운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인류에게 향락과 낙관을 약속하지만 결국 인간은 일생을 마친 후에 이 허무만을 냉담한 심정으로 보상으로 안게 됩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허락하시는 삶의 보람과 만족이 위대한 복음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의 경험과 삶의 긴 여정을 통해서 그가 깨닫고 고백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생존권과 거주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주장 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누리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이 사실은 누리고 즐겨서가 아닌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체득된 성령의 감동으로 얻은 깊은 깨달음이었다. 그가 고백하고 노래한 ‘하나님의 은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은혜가 바울의 삶 전체를 보람과 만족과 감사로 충만 할 수 있었을까?


이 바울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천국의 신비한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을 했고 그 신령한 체험의 현장에서 사람이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비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반면에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고 인간의 육체로 감당할 수 없는 시험과 환난을 겪으며 때로는 살 소망까지 끊어져 마치 사형수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삶의 절망을 맛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육체에 사단의 가시인 질병을 얻어 밤 낮 괴로움을 당하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길고 지루한 고통의 세월을 여전히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문제와 고통이 나를 둘러싸고 여전히 나를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라는 만족과 함께 승리자의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그가 노래하고 고백한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 핍박자요 훼방자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사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요긴하게 쓰임 받게 되었다는 사실, 연약함에도 부족함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고난과 시련의 상황들과 그 상황을 겪는 육체의 한계를 이용하여 우리의 교만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육체의 가시를 이용하셔서 육체의 본질과 한계를 실감하게 해 겸손하게 하시는 그 은혜, 바로 그 겸손으로 나를 지키고 세우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가 바울이 체험한 모든 신비로운 체험보다 그가 육체로 겪는 모든 문제와 역경과 시련의 환경을 초월해 감사하게 하고 감격하게 하며 만족하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주님을 섬기는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우리 입에 이 만족의 노래와 감사의 고백이 충만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나를 사랑하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은혜로 인해 모든 문제와 어려움 중에서도 이 모든 문제와 고난을 이용해서라고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로 만족과 승리의 노래를 외쳐야 한다. 주 안에서는 허무와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만족으로, 모든 환경을 감사로, 모든 과정을 보람으로 충만케 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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