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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손에 신문을

고성우 목사
반조원교회

신학대학 3학년 초쯤의 일이다. 어느 날 커피숍이었는지 식당이었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옆자리에 앉은 내 또래의 대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내용이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것 같은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흔히 쓰는 용어처럼 사용했기에 무슨 전문 학술용어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내가 무식한 것처럼 느껴져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내 또래에서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의 오만함이었지만 말이다. 그 때부터 나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알아 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대학에 진학한 뒤로 학교와 교회 생활이 전부이다시피 했기에 학교공부와 성경공부, 신앙서적 읽기 외에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1학년 때 서양문화사 교수(외래강사)가 침신대 학생들은 책은 많이 읽는 것 같은데 너무 기독교 서적만 읽는 것 같다며 다양한 독서를 권했었지만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는데 그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그 후로 나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로 온 교회의 후배들에게 다양한 교양서적을 읽도록 권하곤 했다.

학부 4년 내내 오로지 학교, 교회, 집이 내 생활공간의 전부였다. 그 때는 지금 같은 단기 해외선교여행이나 배낭여행은 꿈도 꾸지 않던 시절이니 해외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도 3일 이상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권면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학교와 교회 밖에 모르던 그 때의 내 생활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아니 어떤 면에서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며 전도사로 3년간 사역하다가 예정대로 군목으로 입대했다. 군목으로서 기독신자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군종장교로서 모든 병사를 돌봐야 하기에 나름 열심히 병사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몇 개월 못가서 젊은 청년들인 병사들(그 중 70%이상 불신자)의 삶 즉 그들의 꿈, 욕구, 아픔, 고민 등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 넘게 오직 교회 안에서 신자들과만 보내왔기에 어느 순간 불신자들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너무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완할 방법으로 찾은 게 현대 문학 특히 소설을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신학서적 사볼 돈도 없는데 소설책을 산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지내왔었지만 그 때는 문학상 수상집 중심으로 과감하게(?) 사서 읽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종교와 상관없이 제법 많은 병사들과 속 깊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직접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지만 다수에게 목사나 기독교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 마음을 갖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어린 추측을 해본다.


농촌인 지금의 목회지에 처음 올 때, 나는 농촌 목회를 도시 목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반 목회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까지 방학 때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 온 것과 고등학교 때 모심기 봉사 한 번 벼 베기 봉사 한 번 다녀온 것이 농촌 경험의 전부인 내가 농촌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4월이 되면 농번기가 시작된다는 것조차 잘 모르면서도 말이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돼서 농촌 목회는 일종의 특수목회 임을 알게 됐다. 교인들이 대부분 농부이고 그에 따른 생활주기, 방식, 문제 등이 비슷하며 연령구조가 특수하고(젊은 층이 없고) 학력수준의 편차가 적은 것 등 군대 목회 같은 특수목회 분야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몇 년 동안은 하우스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일하는 것을 직접 보며 농사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농부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이 먹고 아픈 데가 늘어나 자식들이 하지 마라고 말리는 데도 자꾸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 일하면 아파서 병원가야 하면서도 한다. 거두는 작물 다 팔아도 약값도 안 되는 데 그렇게 한다. 이유를 물으면 자식들 오면 주려고 한단다. 처음에는 그게 다 인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돈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땅을 그냥 둘 수 없단다. 힘이 닿는 한 땅에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 맺게 해야 한단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단다. 그게 땅에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온 농부의 마음이란다.


어떤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사인 H목사는 목사들에게 “여러분 연극공연을 본 것이 언제입니까?”하고 묻고는 자신은 일 년에 몇 번은 연극 공연을 본다고 했다. 다른 세미나에서 J목사는 영화를 얼마나 보냐고 물으며 자기는 화제성 있는 영화는 꼭 보려고 애쓰며 그것도 가급적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보려고 한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성도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선포와 가르침과 돌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목회자는 성도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독서든 직접 체험을 통해서든, TV나 인터넷을 통해서든 넓게, 때론 멀리, 때론 자세하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손엔 성경을, 다른 손엔 신문을”이라는 칼 바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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