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내용 중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며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 오직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사거리나 길거리에서 구제를 하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계를 시키시는 한편,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외식과 위선으로 단정하시고 본받거나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하시려고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5,16)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이 행하는 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일이 틀림없는데, 하나님께 받을 상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그리고 사람을 더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이 따로 갚아 주셔야 할 상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을 주님의 임재 앞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면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목회자로서 목회라는 명분으로 행하는 실제의 민낯을 보면 심히 불편한 진실이 되어 스스로 수치스러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믿고 외치며 전하고 있는 우리 목회자가 진정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실재와 가치를 스스로 믿고 바라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려고 오신 그 주님의 종으로, 섬김을 받기보다 진정으로 섬기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행20:35) 하신 진리대로 받기보다 주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주님의 제자로서 일관되게 실천하고 있는가? 주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을 신분의 본질로 여기고 그 소명으로 사는 목회자로서 성도들로부터 받는 존경과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유와 권위,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여러 사회적 우대와 예우, 그리고 영적 특권과 여러 가지 혜택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실 상과 연관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셔야 할 상을 받을 자인가? 아니면, 이미 다 받아버려서 이후에 받을 상이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오래전 별세 목회를 외치던 그 목사님께서 어느 해 목회자 세미나 때 이런 간증을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분의 목회 초기에 개척을 하실 때, 생활이 어려운 성도들이 너무 귀하여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 생기면 성도들에게 베풀며 사랑을 실천하셨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은 모든 것에 부유한데 성도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시던 중에 주님께서 감동하시기를 너는 내 말대로 주어서 복이 있지만, 그들은 받기만 하니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하셨단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달은 그 목사님은 그 후부터 성도들로 하여금 작은 것이라도 주는 자가 되게 하였더니 복 있는 사람이 되더란다. 진정 성도들을 하나님의 진리대로 복 있는 사람, 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차라리 내가 복이 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대접을 받고, 성도들의 호의와 사랑을 받는다고 하면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일까? 목사로서 승합차로 심방을 갈 때 직접 운전을 할 때가 아니면 의례 조수석에 앉는다.
가끔 앞자리 앉아야 멀미를 하지 않는 권사님이나 집사님에게 조수석에 앉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목사님이 앉으셔야지 어떻게 제가 앞자리에 앉느냐’고 하며 극구 사양한다. 내가 원하는 바는 내가 가장 뒷자석에 앉으므로 성도가 편할 수 있다면 가장 뒷자석을 내 자리로 지정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지만…. 오히려 내가 원하는 그 자리에 앉으면 차에 탄 모든 사람이 불편해하니 결국 내가 섬김을 받는 복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나의 이런 일뿐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이와 같은 일은 많으리라! 먹어 줘야 하고, 입어 줘야 하고, 심지어 그들의 약점까지 대신 담당해야 하는 일이 좀 많은가?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목회 현장에는 있어서는 안 될, 들어서는 안 될, 알아서는 안 될, 몰랐으면 좋을 뻔한 일들이 해를 더 할수록 보편화되고 있다.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해야 할 우리 목회자가, 사람들의 호의, 물질적인 충족이나 보상, 노후의 보장이나 대책, 내가 이 교회를 위한 고생과 내가 이루고 세운 공적에 대하여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눈앞의 이런 것들로 인하여 일평생 받아 오던 존경과 신뢰를 잃고, 평생의 헌신과 충성에 대해서 하나님께 받을, 하나님이 갚아 주셔야 할 상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현실이 답답하고 아프다.
무엇이든지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이 시대가 불편하고 두렵다. 박해가 극심하던 기독교 초기, 주님의 진리를 따라 주님의 뜻이라면 나의 모든 권리와 소유를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순교의 제물로 내어드리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천국의 보장과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하며 그 소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던 선진들을 본받고 따르는 것은 불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주님의 종들에게 맡긴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눅17:10) 하고, 사람으로부터 눈앞에서 다 받으려 하는 그 어떤 보장보다 오히려 정당한 대가와 보장을 받지 못함으로 인간적으로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믿음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할 때 하나님께서 갚아 주셔야 할, 받을 상이 있는 그런 종이 될 수는 없을까? 지금 지내고 있는 이 사순절 기간에 생각이 더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