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영암 김충기 목사
전쟁 등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든 것은 한국기독교의 지대한 공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선배 목회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때마다 큰 종들을 일으켜 은혜를 주셨는데, 특히 1960년대 이후 김충기 목사님을 비롯한 위대한 성령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은 성령을 폭발적으로 부어주셔서 한국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큰 부흥을 이뤘다.
김충기 목사님이 지난 2019년 12월 25일에 88세의 일기로 소천하신지 6개월이 지난 6월 25일에 수양관 영암동산에서 목사님을 기념하는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이날 제막식에는 2대 담임목사인 피영민 목사와 3대 담임목사인 최병락 목사를 비롯해 박창환 목사, 강석원 목사, 송태준 선교사 등 김충기 목사님과 함께 사역했던 목회자 20여명이 참석했고, 강남중앙침례교회 사역자와 장로, 성도 150여명도 함께 했다. 특히 부인 박인애 사모님과 아들 김성국 목사 가족이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해 의미를 더 했다.
하늘도 축복한 날
이른 장마가 시작됐다는 기상 예보에 따라 큰 비를 예상했지만, 하늘 아버지는 제막식을 크게 축복하셨다. 예배 시간이 되자 잠시 이른 비를 그치게 하시더니, 식이 끝날 즈음 다시 늦은 비를 내리셨다. 김성국 목사는 “아버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최병락 3대 목사님을 중심으로 앞으로 더욱 부흥하여 이전에 없던 위대한 영광을 보기를 날마다 기도한다”고 감동을 전했다.
큰 마음을 가지신 목사님
제막식 설교에서 피영민 목사는 김충기 목사님에 대해 네 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김충기 원로목사님은 큰 마음을 가진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큰 사역은 하나님이 큰 마음을 주셔야만 할 수 있는데 양수리수양관 건립은 한국의 큰 교단도 할 수 없는 큰 일이었습니다.
둘째, 목사님은 강한 마음을 가진 종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 등의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고비도 다 강한 마음으로 통과하셨습니다. 심지어 중풍으로 2번이나 쓰러지셨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셔서 남은 사역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강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셋째로 목사님은 좋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목사님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온 한국교회를 위해 목회를 하셨습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축복을 주시려는 다윗과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충기 목사님은 고통스런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된 날이 6월 25일인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음이 분명하다. 목사님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군대에 입대해 최전방 3사단 23연대에 배치됐다. 입대 후 펼쳐진 인민군과의 진지 육탄전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때 김충기 목사님은 적군과 싸우며 동시에 쉼없이 기도했다. 급기야 적군이 쏜 포탄에 맞고 쓰러졌고 목사님의 몸은 피로 물들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목사님은 육군 수도병원에서 수술과 함께 5번이나 수혈을 하며 생사를 오가던 중에도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완쾌되어 제대를 한 후 서원대로 신학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의 경험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되고, 또한 일평생 국가를 사랑하는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됐을 것이다.
설교자는 말씀을 이어갔다. “김충기 원로목사님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나라의 분단을 아파하고 목회 중에도 국가를 위해 늘 기도하시면서 국가의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우리도 대한민국을 위해 더욱 절실히 기도하라는 원로목사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기억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
코로나19의 극성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원로목사님의 큰 마음이 기억되고, 그분의 사역이 기억되고, 그분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기억되고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최병락 목사는 기념비를 세운 이유에 대해 말했다.
“기념비는 ‘성령의 불’과 함께 늘 기도하시던 ‘원로목사님의 손’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합니다. 목사님을 통한 이 불 같은 역사가 기록되어 저를 비롯해 천대의 후손들이 이 동산을 찾을 때마다 교훈이 되고 전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원로목사님의 사역이 흑백사진이 아니라 칼라사진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와 성도를 깨우는 추모비
추모사는 허요한 목사(강중침출신 목회자 모임 회장)와 박창환 목사(꿈꾸는)가 했다. 특히 박 목사는 김 목사님의 비서였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우리의 기억을 소환했다. “김충기 목사님은 늘 성도들 앞에서 본을 보이는 것이 목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목사님께 배운 예배 당 맨 앞자리에서 드리는 예배의 자세와 새벽기도의 습관이 목회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큰 목사께서 늘 이면지를 아끼시고 예배당의 불을 끄시는 것을 직접 보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목사님과의 목회는 언제나 신이 났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사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 저의 영혼을 깨우고 있습니다.”
영암동산
故 김충기 원로목사님 기념비는 지난 12월 25일 오후 4시 별세하신 직후, 강중침 실행위원들의 결의로 준비됐다. 20만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양수리수양관을 특히 좋아하셨는데 평소 목사님이 즐겨 걸으신 이 자리를 목사님의 호 영암(靈岩)을 따라 영암동산이라 이름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김재도 장로(수양관 사무국장)은 성도들이 와서 편히 쉬며 원로목사님을 추모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했다고 말했다. 1932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목사님은 반조원교회와 함열교회, 대구중앙교회를 담임한 후,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에 성도 40여명과 함께 1976년 2월에 강남중앙침례교회와 양수리수양관을 세워 한국교회 대부흥을 견인했다.
부흥을 원하는 타교회의 모델이 되었고, 끊임없이 영적, 물질적, 인적 지원까지 마다하지 않은 개척지원은 분명 다른 데서 찾기 어려운 선교 방식이라 하겠다. 목사님은 교단 총회장(89년)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91년) 등을 역임하면서 침례교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고, 2002년에는 피영민 목사에게 후임 담임 자리를 물려주면서 마무리 또한 교계 전체에 본이 되는 아름다운 리더십 승계를 실천하셨다.
교단 원로 허긴 목사님은 김충기 목사님을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 침례교의 일반 목회자들은 모든 면에서 자립적이고 자주적인 목회를 하지 못했는데, 김충기 목사님을 바라보며 후진들도 김충기 목사님 스타일의 목회.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대 부흥사가 우리 교단에도 있다는 긍지를 줬고,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는 메시지도 목회자들에게 매우 좋은 모델이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아는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기념비에 새겨진 목사님의 고백이다.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도리어 목사님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글=안병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