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W.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만 받는 구원’(Salvation by Allegiance Alone)은 구원에 대해 논쟁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제목부터가 종교개혁의 주요 모토이자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으로 여겨왔던 이신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의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자칫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원 부제(Rethinking Faith, Works, and the Gospel of Jesus the King)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값싼 구원 문화에서 참된 제자도로의 전환을 위한 대담한 시도”라고 밝힌 출판사의 표현을 주목해 보면, 저자의 주장 배경의 단초를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개인적으로나, 목회현장에서나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주요한 과제 중 하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성도의 삶에 열매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고, 교회 차원에서 그 사회 안에서 교회의 위상과 신뢰는 추락해 맛을 잃고 밟히는 소금 신세가 되기 마련이다.
교회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할 때, 성경이 말하는 소위 ‘찐’ 믿음은 무엇인가?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적 동의인가? 특별한 체험인가? 내적 확신인가? 저자는 신약성경에서 통상 믿음 (faith)과 신뢰(belief)로 번역해왔던 피스티스(pistis)는 ‘충성’으로 대치하는 것이더 정확한 의미이며 왕이신 예수님께 대한 지속적인 충성을 포함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근거로 제2성전 유대교 문헌의 증거와 바울이 왕이신 예수께 ‘구현된 충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그래서 성경에 믿음으로 번역된 부분을 ‘충성’이라고 바꿔 읽으면 상당 부분 그 의미가 더 잘 이해되고 드러난다고 제안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저자의 복음 이해가 깔려있다.
저자에 따르면 복음에는 △예수는 성부와 함께 이미 존재하셨으며 △그는 성육신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으며 △성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며 △무덤에 묻히셨으며 △그는 성경에 따라 3일만에 부활하셨으며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보여주셨으며 △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8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저자는 이 요소 중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십자가와 부활보다는 예수가 왕으로, 그리고 메시아로서 왕좌에 오르셔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이라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저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해 받아들이고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주장은 값싼 은혜로 얻은 구원에 취해 행함과 열매가 없는 성도와 교회에게 경각심과 도전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다.
저자가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면서도 믿음을 충성이라는 말로 대치할 때 자연스럽게 “오직 믿음”의 개념에 포함돼 있지 않은 행함의 내용이 포함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더구나 이러한 충성이 “최종적인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칭의와 의의 전가 개념도 전통적인 이해와는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은 것을 말한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인간에게 주입되며, 이는 충성을 통해 효력을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롭게 된 자라도 예수 님께 순종, 즉, 충성에 실패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니라 결국 예수님께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행위)에 의존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또한, 구원에 있어서 개인적 선택을 지지하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하면서 공동체적 선택을 주장하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일찍이 본 회퍼가 통렬히 지적한 바 있는 소위 “값싼 은혜”로 불리는 이신칭의 구원론에 대한 얄팍한 이해는 오늘날에는 과거 로마가톨릭의 금전적 이익을 위한 면죄부와는 또 다른 양상의 ’제자도가 사라진 헤픈 면죄부‘가 만연하게 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생명력은 약화되고 교회가 ‘세상의 빛’은 고사하고 본회퍼 시대에는 히틀러와 같은 세기의 독재자를 용인하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비단 지난 세기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어느 시대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 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을 때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됐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고, 성도의 삶과 신앙의 괴리감이 커질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최근 이런 신학적 반성을 담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현 좌표가 성경에서, 복음에서 상당히 멀리 빗겨나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이 책은 그밖에도 몇몇 난점들이 있지만, 신약에서 우리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상기시켜준다는 유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님(큐리오스)으로 고백하는 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재권 즉, 왕(주인) 이신 예수님께 충성(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송우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