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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 한 장”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보(週報)는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면 제일 먼저 그 교회 주보(週報)의 어느 부분을 보십니까? 대게 주보 뒷면에 보면 광고와 아울러서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지난주일 출석 상황과 헌금자 명단을 집계한 것이지만 “주보 한 장”으로 그 교회의 교세와 형편을 가늠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교회에서는 통계란에 여러 항목을 만들어서 전체 숫자를 많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런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유령 숫자까지 넣어서 통계를 만드는 교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본래 주보(週報)라고 하는 것은 주일의 예배를 안내하고 교회의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일종의 그 교회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즈음 대개의 주보는 “예배 안내”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교회 사진이나 큼직하게 넣고 목사. 전도사. 안수집사(장로)의 이름까지 전면에 게재해 한눈에 교회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하고 구역목장 통계나 조밀하게 해서 교인은 몇 명이나 되고 헌금은 어느 정도 나온다는 것을 선전한 “교회광고지” 같은 인상이 짙습니다. 하기야 요즈음은 “뜻” 보다는 “목소리”의 크기로 시비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교회에서 “주보 한 장” 내는데도 자기과시를 해야 하고 내용과 상관없이 겉만 번지르게 하게 하면 훌륭한 교회로 인정을 하게 되니 굳이 예수님 말씀을 빌린다면 이것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지성미”보다 “육 체미”를 더 중요시 여기고 인격적인 교양보다는 얼굴을 꾸미는 화장에 더 신경을 쓰고 사는 시대가 되다 보니 교회에서도 영적진리나 내실보다 겉모양에 더 관심을 가지는 모양새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생 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 보면 이런 이야기 내용이 나옵니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①그 친구는 목소리가 어떠냐? ②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③나비를 수집하느냐? 이렇게 묻는 일이 절대 없고 ①나이가 몇이냐? ②형제가 몇이냐? ③몸무게가 얼마냐? ④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버냐? 하는 것이 어른들이 묻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창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고운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 대신 “10억 짜리 집을 보았다”라고 해야 아! 참 훌륭하구나! 하고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알맹이 보다 껍질을 좋아하고 감정이나 직관보 다는 사실과 계산을 더 중요시하는 현대인을 비꼬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을 교회에 적용시켜 보면 영(靈)의 문제보다 육(肉)의 문제로 시비하고 교회의 사명이나 영적 성장보다는 건물의 크기와 교인수로 그 교회를 판단하는 현대교회의 외식(外飾)을 꼬집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교역자들이 만나서 하는 인사에서 들을 수있는 이야기지만 처음 만났거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오가는 대화가 ①교회 많이 부흥했지요?

②교인은 몇 명이나 모입니까? ③일주일에 헌금은 얼마나 나와요? ④사례비는 얼마나 받아요? 하는 것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한 달 주보는 얼마나 찍어요?”하는 몇 가지 질문으로 그 교회의 형편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교회의 크기와 숫자와 교역자의 보수로 그 사람 교역자를 평가하는 경우입니다.

 

시골교회 교역자는 사람됨이 시골교역자 밖에 되지 못하고, 도시교회 교역자는 그만큼 훌륭하기 때문에 좋은 교회에서 목회 한다고 단정하는 것입 니다.

 

농촌 교역자들의 도시 지향성이나 개척교회보다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진 화려한 교회를 교역자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려고 하는 현상도 이를 잘반영해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사회는 한마디로 가치관이 전도(顚倒)된 사회라고 할수 있는데, 교회가 이렇게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하고, 환경과 편의에 따라 변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현대교회의 추락상을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봐도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명분을 세우는 데만 신경을 쓰고 실질적인 면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사람들의 입에서 떠날 사이가 없으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빈곤과 정체를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도 명목만 내세우다가 마침내 허식과 과장이 늘어 자기 위치도 망각하고 교회본연의 사명마저 잊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특별히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정신을 차려 주위가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반응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실까 하는데 관심을 둬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실속은 없으면서도 체면에만 치중하는 “남산골샌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장희국 목사 / 평택임마누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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