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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요로운 노숙자의 삶

하늘붓 가는대로 –189

권혁봉 목사

한우리교회 원로목사

 

노숙자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도 노숙자는 있다.

노숙자는 노숙자의 유전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말에 오죽하면 노숙자가 되었겠느냐고 항의해오는 자도 있을 수 있지만 노숙자들 세계의 내면을 보면 꼭 유전자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 유전자란 노숙을 즐긴다는 유전자가 아닐까. 의당히 말하자면 그것은 게으름의 변명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대왕실 높은 집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리를 유전자로 돌린다면 노숙자의 삶도 유전자로 돌려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전자는 죄가 없다. 이래저래 노숙자가 되어 노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버렸으면 그 나름대로의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말이다. 대게 모든 노숙자가 불행하고 불편하지만 어떤 노숙자는 전혀 그렇지 않게 산다.

그것은 그 노숙자의 삶의 경영이다.

 

내가 노숙자와 같이 동거한 적은 없지만 이따금 열차 타러 서울역을 가노라면 그들의 언행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해서 간접적으로 얻어내는 분위기도 있고 조선일보 2019년 2월 23일 주말 르포에 서울역 4박 5일 노숙의 고수(高手) 동행 기사가 있어서 이 글을 씀에 도움이 됐다.

어떤 노숙자는 풍요롭고 재미있는 노숙을 즐긴다. 특수한 노숙자의 상태다.

 

어떻게 그렇게 사는가? 노숙 생활의 지혜를 얻어낸 때문이다. 지금 본인은 온 국민이 노숙자가 되라는 것은 결코 아님을 강조하는 바이다. 단지 노숙자의 노숙 생활에서 얻어낸 기술이 멀쩡한 정상인의 정상생활에서도 통할 수 있지 않나 싶어 말해보는 것이다.

 

기술과 지혜가 있는 미식(味食) 로드(Road)가 있다. 어떤 급식 처에서 어느 날은 추어탕 배식을 하는지를 안다. 메뉴 정보를 곰곰이 적어두었다가 한 끼에 두 번씩 먹는 행운도 가진다. 어떤 노숙자는 어물어물하다가 한 끼를 놓치는 수도 있다. 지혜(?)로운 노숙자는 빨래처와 이발처도 안다. 겨울 대처법도 안다.

 

아파트 주택단지에 가서 버리는 솜이불몇 종류를 취하고 잘 아는 가게에 가서 종이 박스를 구입해오고 또 고정된 건물의 어느 모퉁이를 잡아 거기 종이 박스 집을 짓고 종이박스를 깔고 이불 두 세채를 덮고 자면 끝이다. 어떤 노숙자는 “한번 맛을 들리면 실내에서는 잘 수 없다”고 하니 이게 참 말인가.

 

구걸에도 그냥 깡통 갖고 길거리에 있는 자는 고전형(古典型) 구걸이고 행인에게 천원만 달라는 식의 당당형 구걸이 있고 하필 빵집 앞에서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저 빵 먹게 돈 한푼 달라는 식의 사정형 구걸도 있다고 노숙자 세계에는 무법천지라서 약육강식 세계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게 사실이지만 살아내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 세계에서 편안히 사는 방법으로는 첫째로 보수가 되려고 세력 경쟁을 하지 말 것과 둘째로 노숙자 이전의 자기 자신의 잘난 과거를 과시하지 말라는 것과 셋째로 구걸해서 얻은 수입을 약간씩 나눠 주면서 인심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노숙자 세계에서 보스가 되어봤자 무슨 큰 영광이랴?

 

모든 국민이 노숙자 생활하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재론하면서 여기서 느끼는 정상인의 생활 철학을 끌어낼 수 있지 않느냐 말이다. 언론에 두 사람의 최저 생활비가 얼마라는 통계를 내어놓는데 그 최저 생활비는 거지의 노년에게는 너무 높은 통계다. 훨씬 그 밑도는 것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

사람은 좀 불편하면 아주 편하고 좀 가난하면 아주 부하다. 부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가난하면서도 부한 사람이 있다. 이것은 물론 느낌일 수도 있다.

 

노숙자의 노숙생활에도 어떤 노숙자들은 삶의 기술, 민첩, 지혜를 짜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