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 다가왔다.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게 된 지 3년째다. 매번 코로나19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아프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꿈꾸는 것은 일상의 회복이자 모이는 예배의 회복이기에 다시금 단어들을 꺼내든다.
지난 3년간 교회는 많은 것을 잃었다. 사실 단순히 코로나19 하나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여러 사회문화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장기간에 걸쳐 이어온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인해 엔데믹으로 현재의 상황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교회의 대면 예배로 모두가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한 그 사이 희생을 강요당한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천지를 비롯한 수많은 이단들이 한국교회를 향한 마수를 거두지 않고 있어 한국교회가 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고 있다.
문제는 교회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또한 국민통합이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 불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6월 지방선거일까지 불안은 계속될 전망이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현 정권과 새로운 정권 창출 세력의 날 선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갈등을 봉합하고 치유해야 할 교회 또한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다. 지금은 모두가 사사시대에 사는 것 같다. 한국교회는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아픔을 이겨내고 수험생처럼 다시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사실 ‘대학수학능력시험’과도 많이 닮았다. 이것을 잘 버티고 이겨낸다면 그 다음 발걸음이 조금은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는 모두의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고 말았다. 교회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교회 수양관을 코로나19 격리자를 위해 내어놓고 혈액 부족으로 위기를 겪을 때, 교회가 자발적으로 나서 헌혈운동을 전개했다. 방역 정책으로 인해 소규모 교회는 예배당 문을 열지 못했으며 대형교회들도 방역 장비를 구비하며 대응해 나갔기에 억울함은 더욱 배가됐다. 하지만 그러한 억울함조차 우리는 이겨내야 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한 영화의 대사처럼 처절하게 살아남아 강한 영향력을 내뿜어야 했다.
하지만 종합적인 교회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한 평가는 냉혹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처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구한말 조선 땅에 교회들이 세워질 때는 어떠한 터전과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교사들의 순교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됐다. 큰 교회를 짓고 대형집회를 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정확히 진단해 체질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위에 서서 가르치려 하지 말고 낮은 곳에 함께 거하며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은 성전에 장사하는 이들을 꾸짖으시며 이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사 사흘만에 부활하시며 이를 성취하셨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다. 부디 이번 부활절을 계기로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부활을 노래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