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아래의 지혜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곳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의 뜻은 바람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바람을 뒤쫓아 붙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바로 전도서를 펼쳐야 할 시간입니다.
관=2부 ‘바람을 잡는 그대에게’ 북 콘서트 사회를 맡은 김관성 목사입니다. 본격적으로 이 책을 가지고 우리 최 목사를 한번 쪼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람을 잡는 그대에게’가 전도서 강해잖아요. 내 개인적인 편견일지는 몰라도 강남하고 전도서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왜 목사님께서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부임하신 후 이 전도서 강의를 시작하게 됐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전도서를 택한 이유는 우리 교회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건축 프로젝트하고 좀 맞물려 있습니다. 강남이라고 하면 비싼 땅, 비싼 집, 그리고 성공한 기업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그 한가운데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이거든요. 한국에서 가장 성공의 대명사가 강남이고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 그런 분들이 가득 계시고 그렇게 잡을 것을 다 잡아 봤을 때에 느낄 수 있는 허무함을 우리가 되짚어보고 싶었습니다.
이미 잡아봤는데 허무함을 느낀 상태에서 허무한 줄 아는 것을 또 잡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가 다른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어느 정도 잡아본 분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전도서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그래서 최 목사는 바람을 잡으셨습니까? 최 목사가 인생을 살면서 쫓아간 바람,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은 그 바람은 무엇이었는지 솔직하게 한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저는 이 바람을 꽤나 일찍부터 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 세상적인 성공이나 부 이런 것은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목회적인 성공을 하고 싶었어요. 군대에 있을 때에 나는 기도해 주는 집사님 한 명 없는 집안이기 때문에 유학밖에는 길이 없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상당히 세속적인 목적이었어요.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하면서 사우스웨스턴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그 바람을 잡은 것 같았거든요. 바람을 잡은 것 같았던 그 시절 동안에 여전히 잡았는가 생각을 했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많은 기도 제목들이 있고 하루하루 일상이 너무나도 고단했습니다.
사우스웨스턴신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계속 올라가기도 했고 ‘학생 중에 학생’이라는 미국에서 내는 책자에도 내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 뉴욕이 아니면 LA, 아니면 한국에 큰 교회로 보내달라고 야망적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더라고요. 하나님은 계속 달라스에 머물게 하셨고 제가 생각했던 가장 최악의 그림으로 목회를 시작하게 하면서 많은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바람을 잡으려고 했다가 이것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꽤나 일찍 깨달은 것이 나에게는 또 다른 복이었던 것 같아요.
관=이 책에서 가장 탁월한 표현 하나를 꼽으라면 ‘영원이 순간에게 말을 걸다’ 이 말이에요.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라 참 좋아요. 그런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의미를 좀 풀어서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해 아래에 새 것이 없도다’라고 하는 말이 전도서의 핵심입니다. 전도서를 많이 읽지 않아도 대부분 아는 구절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는 이 말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런데 해 아래의 세상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해 위에 세상이 있겠죠. 그러니까 전도서는 전체 1장에서 12장까지 선명하게 하나의 평행선을 긋는다면 그것은 해 위의 세상과 해 아래의 세상을 나누는 기준에서 지속적으로 해 위 세상의 가치들이 해 아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 거죠.
해 아래의 세상이 다 인줄 알고 살아가는 인생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 끝난 것 같고 그것을 가지면 인생을 다 이룬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에게 신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인생 속에서 체득한 사람이 지혜자 솔로몬이죠. 그가 인생의 해 아래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뤄본 다음에 하나님의 신적인 감동으로 해 위 세상의 메시지를 해 아래에 전달해주는 것, 이것이 전도서의 핵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원이 순간에게 말을 걸었던 순간에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과 그 세상이 나에게 지금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것, 해 위 세상의 말을 해 아래 세상으로 가져온 분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전도서 전체가 해 위의 세상에서 해 아래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늘의 소리라고 표현을 해봤습니다. 그것이 ‘영원이 순간에게 말을 걸다’의 의미입니다.
관=‘바람을 잡는 그대에게’를 보니까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를 아주 강조해서 전하셨던데 그러면 최 목사가 삶을 즐기거나 누리거나 할 때 주로 무엇을 하나요? 어떤 순간에 일상의 소중함과 그 즐거움이 찾아오나요.
최=우리가 전도서를 이해할 때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할 때에 잘못하면 허무주의에 빠져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허무주의에 빠져서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세상의 가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헤벨’이라고 하는 의미가 수증기처럼 싹 사라져 버리는 그러한 허무도 말하고 있지만 굉장히 영원의 시간에 비해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짧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짧음이라고 하는 이 차원에 있어서 모든 시간들은 간절해지는 것이죠. 우리가 8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나중에 죽어서는 ‘올람’에 올라가 영원을 살아갈 텐데 해 아래의 삶을 허무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 짧디 짧은 헤벨의 시간을 감사하면서 가장 기뻐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이 허무라고 하는 것을 짧음으로 해석하게 되면 주어진 하루하루에 숨 쉬는 것조차 소중해지는 것이죠.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모든 날들이 눈부신 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사시사철 햇빛만 비치면 그곳은 사막이 된다”라는 구절도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아라비아 속담에서 이 문장을 인용했는데 그러면서 최 목사의 목회를 좀 생각을 했어요. 강중침에서의 삶과 목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이곳에 있으면서 제일 고통스러운 순간은 언제고 또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최=이 헤벨의 세상이 참 다중적인 것은 겨울 속에 여름이 들어가 있고 여름 속의 겨울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때가 고통스럽다거나 행복하다고 명확히 정의내리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 안에 나를 넘어지게 하는 무서운 비수가 들어가 있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 속에서 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전건축을 여름이라고 했을 때 이제 우리가 새 성전에 들어왔으니까 이제는 부흥해야 한다고 하는 또 다른 여름을 찾으려 한다면 지금의 여름(행복)을 못 누릴 것 같아요.
나는 헤벨의 세상에 짧은 인생 속에 우리 성도님들도 겨울 속에서 여름을 찾아서 이 상황에서 기쁨도 찾고 의미도 찾고 그러면서 또 진짜 여름 같은 곳으로 갔을 때는 이제 다 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섭게 벼리고 있는 칼날을 조심하며 넘어지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관=이 책의 ‘재판과 심판 사이를 사는 인생’이란 챕터에서 전도서 본문을 가지고 복음 설교로 이때까지 전개돼 오던 인문적 어프로치를 완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나는 이 부분이 이 설교의 정점이라고 생각해요. 침례교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의 강점은 복음적인 내용을 단순 명료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재판과 심판 사이를 사는 인생에서 인문적 어프로치를 넘어서서 복음 설교를 그 본문에서 끄집어내서 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논리와 내용을 작성하셨는지 나는 솔직히 그 본문의 내용에서 그런 설교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이 부분을 목사님이 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모든 분들이 그렇게 구도를 나누는 건 아니지만 전도서를 1장에서 12장까지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으려고 하면 찾을 구절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면 전도서는 그분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해 위의 세상과 해 아래의 세상이 만나는 접점에 서 있는 분이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이거든요. 올람에서 헤벨로 내려오신 유일한 분, 이 땅에서 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전도서에는 없어도 코헬레트라고 하는 이 사람이 신적인 감동으로 하늘의 소리를 이 땅에 들려주는 그 모든 접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냥 헤벨을 살아가는 코헬레트, 지혜자가 들려주는 지혜서로 전달하기보다는 전도서가 살아나려면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로 항상 귀결돼야 참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으로 해 아래 세상의 허무함, 정의라고 하지만 굽어진 정의, 인간 지혜의 한계, 성공이라고 하지만 나의 성공이 누군가에게 불행인 기울어진 성공, 이런 것들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 장 1절에 가면 이 전도서의 핵심이 나오는 것이지요. 청년들이여 너희 젊었을 때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이것이 전도서의 완전한 핵심이기 때문에 이 헤벨에서 우리가 인생 최고의 목적과 목표는 창조주를 하루라도 젊었을 때 만나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이자 의미라고 봅니다.
이번에 북 콘서트를 하고 싶었던 것은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아니라고 말할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쓴 10권의 책 중에 나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꼭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통해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생각하고, 하루를 살아도 내가 무엇을 붙잡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전도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전도서 전권을 강의한 책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내가 내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낯 간지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나는 이 책이 가능하면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서 북 콘서트를 하게 됐습니다.
범영수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