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한글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것은 영국에서 온 ‘존 로스’ 선교사였지만, 그의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1877)’ 교재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대중화시킨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미국의 ‘호머 헐버트’ 선교사였다. 그는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었다. 때문에 당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는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을 해줬다. 그런 그였기에 고종에게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 서구의 언어식 표기요소를 적극 권장했고, 또한 국문연구소 설립을 건의하여 만들게끔 했다.
이런 그의 노력으로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에는 본격적으로 띄어쓰기 등이 도입되게 됐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는 정착단계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에는 과거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자국어 성경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긍휼의 섭리를 심고 계셨던 것이었다.
이제 ‘띄어쓰기’에 대한 에피소드를 뒤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글 성경의 번역 과정을 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한글에 띄어쓰기를 처음 적용한 ‘존 로스’ 선교사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서북쪽의 작은 항구인 라리키에서 1842년 8월 9일 양복점을 운영하던 부모님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인 로스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가문에 믿음의 뿌리를 전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했는데, 어느 날 선교학 수업을 듣는 중에, ‘누가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란 강한 도전을 받고, 동아시아 선교사로 지원했다. 결혼한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의 해외 선교부에서 1872년 8월에 중국 선교사 파송을 받고, 머나먼 중국으로 향했다.
거친 항해 끝에 중국 상해에 도착한 부부는 선배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적응했고, 어느 정도 중국의 문화와 생활에 적응된 로스 부부는 ‘영구’라는 지역에서 사역을 하다가 ‘선양’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1889년 선양에서 ‘동관문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동관문교회’는 1899년 중국의 외세 배척운동인 ‘의화단 운동’ 때 교회건물이 안타깝게도 파괴됐다.
그러나 이후 새로 지어진 교회는 1966년 1976년까지 시행된 ‘문화혁명(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 때에도, 다행히 파괴되지 않고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로스 선교사가 활동하던 당시, 일부 서양 선교사들은 서구 우월주의 사상이 강해, 중국인들을 굴복시키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며 선교사역을 했다. 결국 이런 상황들은 탈이 나게 됐고, 선교사들을 배척하는 결과로 낳았다. 역사학적으로 보면,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외세와 기독교도 탄압했던 ‘의화단 운동’의 시초를 제공했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존 로스는 선교사역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서양의 지혜가 있는 만큼 동양의 지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서양인은 동양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낮은 자세로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다. ‘서양은 옳고, 동양은 틀리다!’는 생각에서 ‘서양과 동양은 다를 뿐’이라는 자세로 중국인들을 섬겼던 것이다. 로스 선교사의 이런 포용과 배려의 자세로 인해 중국인들은 그에게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중국에서의 사역이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이렇게 중국에서 순조롭게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어느날, 그에게 뜻밖의 비보가 들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