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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5)

조선의 “새빛” 선교사들 (7)

조선행이 좌절됐던 토마스 선교사의 눈앞에 나타난 ‘제너럴셔먼호’는 기회였다. 


제너럴셔먼호는 민간상선이었다.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아편전쟁 등의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민간상선인 제너럴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제너럴셔먼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미개국(未開國)으로 여기며, 조선 개항을 선점해 한몫 잡을 생각이었다. 그는 배에 보급품을 채우고, 선원을 모집하기 위해 중국에 기항했다. 그러나 기항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 용선계약이었다. 용선계약은 선박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무역회사 등)가 선박회사로부터 선박의 전부 또는 일부를 빌리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을 가리킨다. 선주 프레스턴은 영국 회사인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한다. 이후 교역할 상품을 싣고, 그 다음으로 조선어 통역관이 필요했는데, 메도스 상사의 알선으로 인해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추천을 받은 것이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의 민간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해 꿈에 그리던 조선으로 다시 떠날 수 있게 됐다. 


고종 실록 기록에 의하면 1866년 7월 25일 평안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평양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항행(航行)을 강행,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맛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됐다. 식량 등 보급품이 떨어진 승조원들을 평양 관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평양의 관리들은 그들이 불법항행을 했고, 민간상선이었지만, 외교적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대접해주려고 했었다. 


당시 통상과 교역 목적의 이양선(모습이 다른 배, 서양 배를 지칭)은 이 시기 이전인 순조, 헌종, 철종 시대부터 여러 차례 보고됐고 조선 조정은 통상과 교역은 거부하되 잘 달래 보내라는 방침이었기에 제너럴셔먼호 자체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제너럴셔면호의 승조원들이 자재와 식량을 나눠주려고 했던 조선 군민(군인과 민간인) 7명을 사살하고 약탈하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군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다치고 죽었다. 제너럴셔먼호에 대포가 있어 이것을 두고 무장상선 혹은 군함이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바다에는 해적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원양(遠洋)으로 나가는 선박은 상선이고 수송선이고 연락선이고 간에 무조건 대포로 무장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당시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협상을 위해 중군(무관) 이현익을 보냈으나, 셔먼호 승조원들은 도리어 그를 잡아가두고 폭력 행위를 더욱 자행했다. 이에 평양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총을 쏘았다. 그러다 결국 평양 군졸들과 백성들은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지르게 됐다. 배는 전소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승조원들은 배에서 탈출을 감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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