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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9)

조선의 “새빛” 선교사들-10
백정수 목사
더가까운교회

전 세계 이용자가 5억 명에 달하는 외국어 학습 앱인 ‘듀오링고’에 따르면,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다음인 다섯 번째로 인기 많은 외국어다. 그만큼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1위다. 구글 트랜드에 따르면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이 구글에서 한글로 검색하는 총량은 최근 5년 동안 3배 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 따르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전 세계의 대학교 수는 1991년 151곳에서, 2022년 1400여 곳으로 무려 9.3배 넘게 늘었다고 한다.


한국어의 영향력이 점점 세계화가 되는 점이 감개무량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이라는 90년대 유행했던 말처럼, 현재 한국어의 세계화 돌풍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감사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지만, 한글의 띄어쓰기를 최초로 교재에 도입하고, 신약성경을 한글로 최초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가 가장 많이 떠오르는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한글 창제의 주역인 세종과 그의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1874년 10월, 존 로스는 ‘고려문’으로 이동했다. 고려문은 지금의 중국 단둥시에 속한 ‘평청’이란 지역이며, 북한 신의주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이다. 


가끔 학자들조차 고려문을 ‘지명이나 마을’로 오해하는데. 고려문은 지명이나 마을이 아니다. 이곳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역이며, 목책(말뚝을 박아 만든 나무 울타리)을 둘러친 국경경비 시설이 있었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 부르기도 했고, 변경(영토 경계)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의주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상주하는 별정소(別定所, 출입국관리소)가 있었던 곳이다. 쉽게 말해 고려문은 국경 지역이다. 그 근방에 교역(무역)을 할 수 있는 장이 있었는데, 그 장을 통칭 고려문으로 부른 것뿐이었다. 


근데 왜 하필 ‘고려문’으로 불렸을까? 왜냐하면 상당수의 고려인들이 국경 지역 근방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1636년 병자호란(청나라 침입) 때 끌려간 고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을 했던 곳이 고려문 근방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알겠지만, 당시 고려문이 국경 지역이었다는 것은, 현재의 중국 단둥시 지역 일부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고려문은 여러 면에서 우리의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서술한 대로 이 고려문에서는 정기적으로 장(무역)이 열렸다. 여기서 조선의 인삼은 중국인들에게 인기였다. 소설 상도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거상 임상옥’이 인삼 무역으로 거부가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인삼이 재배됐지만, 당시 중국 최고의 인삼이라고 자처하는 ‘요동삼과 상당삼’이 조선 인삼보다 약효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중국 내에서는 자국 인삼보다 조선 인삼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으며, 수요를 못 맞춰 가격이 급등했고, 더불어 조선의 홍삼 역시 중국 내에서 수요가 많아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여기서 ‘산삼, 인삼, 홍삼’의 차이를 아는가? 먼저 ‘산삼’은 자연에서 자생한 것이며, ‘인삼’은 사람이 직접 관여해서 재배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삼’은 인삼을 찌고 말린 것이다. 찌고 말리는 과정을 증포(蒸曝)라고 하는데, 이때 인삼이 붉게 된다고 하여 홍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 아픈 역사가 있다. 원래 조선의 산삼을 고려의 산삼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청나라 시절부터 고려가 산삼을 조공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자생하는 산삼으로는 조공의 양을 감당하기 어려워, 산삼의 씨를 뿌려 인위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인삼이 된 것이다. 


더구나 홍삼이 만들어진 배경도 안타까운데,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인삼을 싣고 가다 보면 곰팡이가 피거나 상하는 인삼이 많아 골치 아팠다. 그래서 인삼을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만들어진 것이 홍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려 때부터 중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판매를 했기에 조선으로 국호가 바뀌었어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조선의 인삼을 얘기할 때, ‘고려 인삼’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고려 인삼이 당시 일종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려문에서의 장날은 존 로스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조선인을 만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조선의 쇄국정책이 강화되어 조선인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아, 존 로스가 조선인과 대화를 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비록 어떻게 기회가 되어 만나는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조선인들은 복음보다 존 로스가 입고 있던 양목(洋木, 기계로 짠 영국산 섬유 면제품)에 관심이 더 많았다. 실망하는 존 로스에게 어느 날 어떤 남자 무역 상인이 찾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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